길위의단상

다람쥐가 되어 간다

샌. 2020. 2. 6. 12:28

# 1

 

공돈 20만 원이 두 달 전에 생겼다. 요긴할 때 쓰려고 책장에 있는 책 속에 감추어 두었다. 젊을 때부터 책 속에다 비상금을 숨겨 두곤 했다. 책 제목만 기억하고 있으면 아무 때나 꺼낼 수 있으니 비밀 보관함으로는 제격이었다. 아내에게 들킬 염려도 없었다. 의심이 간다고 많은 책을 전부 꺼내 볼 수는 없는 일이 아니겠는가.

 

이번에 돈이 필요해서 책장 앞에 섰다가 난감한 일이 생겼다. 어디에 넣어 두었는지 도대체 기억이 안 났다. 손이 자주 가는 책을 중심으로 찾아봤지만 허탕이었다. 아무리 두 달 전 상황을 더듬어도 깜깜했다. 그렇다고 모든 책을 뒤져볼 수는 없는 일이었다. 몇 차례 들락날락하다가 결국 포기했다. 20만 원은 훗날 엉뚱한 사람 손에 들어갈 확률이 높아졌다.

 

# 2

 

도서관에 갈 때마다 한 번에 서너 권을 빌려온다. 대출 기한인 두 주 정도에 읽을 양이다. 그런데 요사이는 읽은 책인 줄도 모르고 빌려오는 경우가 있다. 몇 장 넘기다 보면 느낌이 이상하다. 낯익은 기시감이다. 블로그에 찾아보면 전에 읽었던 책이다. 감상문까지 적었는데도 읽었던 책인 줄 모른 것이다. 심지어는 1년 전 책마저 그럴 때가 있다.

 

책벌레라 할 수는 없어도 다른 사람에 비하면 책을 많이 읽는 편이다. 만약 읽은 책 내용의 일부만 기억한대도 박학다식하다는 소리를 들을 것이다. 아내는 자주 말한다. "책 읽은 사람이나 안 읽은 사람이나 똑 같애." 나도 변명할 말은 있다. "감이불취(感而不取)." 느끼되 취하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내 의지가 아니라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되었다. 원래 기억력이 부실하지만, 요사이는 허탈해지는 빈도가 점점 잦다.

 

# 3

 

며칠 전에는 차 키를 못 찾아서 한참 소동을 벌였다. 약속 시간은 다가오는데 차를 움직일 수 없게 된 것이다. 차 키를 두는 곳은 정해져 있다. 책상 서랍 안이나 옷 주머니다. 서랍 안에 없으면 옷에서 찾으면 된다. 간단한 일이다. 그런데 마지막 운전할 때 무슨 옷을 입었는지 도무지 기억이 안 났다. 입었을 만한 옷 주머니를 모두 뒤지는 수밖에 없다. 그래도 나오지 않았다. 결국은 엉뚱한 데서 나왔는데, 츄리닝이었다. 춥다고 안에 츄리닝을 걸쳤던 모양이다.

 

차를 어디에 세웠는지 몰라 허둥대기도 한다. 누구나 있을 수 있는 일이지만 보통의 경우에는 곧 기억해 낸다. 그러나 몇십 분간 이리저리 방황한다면 어떻게 될까. 한 번은 집을 못 찾은 적도 있었다. 술에 취하긴 했지만 방향 감각을 완전히 잃어버리고, 내 집을 어디로 가야 하는지 새하얘졌다. 길거리에서 헤매는 치매 노인의 심정을 미리 경험한 셈이었다.

 

# 4

 

아내가 부엌에서 자주 하는 말이 있다. "어! 이런 게 있었네." 냉장고에 언제 넣어뒀는지 까맣게 잊어버린 것이다. 냉장고에 가득 찬 음식물을 기억하는 것은 내가 봐도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이건 주부 책임이 아니라 냉장고 탓이다. 더구나 보통의 가정집이라도 이런 냉장고가 두세 개는 된다. 여자들은 빈 냉장고를 못 봐 주는 것 같다. 채우기는 하는데 관리는 비효율적이다.

 

늙을수록 단순해질 필요가 있다. 개혁을 한다면 우선 냉장고부터라고 생각하지만, 아내는 냉장고 얘기 꺼내는 걸 질겁한다. 남자의 잔소리는 냉장고에서 시작된다는 걸 직감적으로 아는가 보다. 지금은 다른 걱정 할 때가 아니다. 내 발등의 불이 더 급하다.

 

# 5

 

다람쥐는 가을에 도토리를 모아서 이곳저곳 땅에 묻는다. 겨울 양식으로 삼기 위해서다. 그런데 다람쥐는 자기가 묻은 곳을 십 중 팔구는 기억하지 못한다고 한다.

 

늙을수록 다람쥐의 기억력을 닮아 간다. 뇌세포가 사멸하니 어쩔 수 없는 현상이다. 그러다가 치매에까지 이르게 되는 건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장수 사회의 비극이다. 하지만 다람쥐는 사람과 달리 천성대로 자연스럽게 살아간다. 노후나 죽음을 걱정하는 다람쥐는 없다. 이젠 머리 나쁘다고 다람쥐를 욕할 수 없다. 도리어 다람쥐처럼 살아갈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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