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위의단상

타이젬 4단

샌. 2020. 1. 20. 11:40

기원에서 모여 바둑 두는 모임이 해체되고 난 뒤 심심해졌다. 바둑은 내가 제일 좋아하는 취미인데 1년 넘게 바둑 둘 기회가 안 생겼다. 아는 사람 중에 바둑을 즐길 수담 친구는 없다. 있다면 불원천리하고 찾아갈 것이다.

 

요사이는 인터넷으로 바둑을 두는 사람이 많다. 인터넷 바둑은 편리하면서 상대가 많아서 좋다. 컴퓨터만 있으면 중국이나 일본 사람과도 대국할 수 있다. 전에 인터넷 바둑을 둬 봤지만 내 스타일과는 맞지 않아 곧 접었다. 인터넷 바둑은 속기로 너무 호흡이 빠르다. 장고파인 나는 도저히 적응이 안 된다. 두 번째는 바둑 두는 맛이 나지 않는다. 바둑판 위에 돌을 놓을 때의 감각과 소리가 없다. 인터넷에도 전자음 효과가 있지만, 실제 나무 바둑판 위에 돌이 접촉하는 맑고 경쾌한 소리를 따라올 수는 없다. 인터넷에는 오로지 승부만 있을 뿐이다.

 

그렇지만 이가 없으면 잇몸이라고, 바둑 갈증을 견디기 힘들어 두 달 전에 타이젬에 라이트 회원으로 가입했다. 타이젬은 오로와 함께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인터넷 바둑 사이트다. 처음에는 3단을 신청하고 들어갔는데 17승 3패를 하고 4단으로 승단했다. 타이젬 승단 규정은 20판을 기준으로 승률이 70%(14승 6패) 이상이면 한 단이 올라간다. 승률이 90%(18승 2패)를 넘으면 두 단이 올라가게 되어 있다. 반대인 경우에는 강단을 한다.

 

지금은 4단에서 놀고 있는데 승률이 50%와 60% 사이에서 오르락내리락한다. 70%를 내기에는 벅차다. 이런 실력이라면 5단에 올라가더라도 금방 미끄러질 것이다. 여기서 단련을 받고 실력을 다진 다음에 5단으로 올라가서 최대한 버텨보는 게 올해의 바둑 목표다. 다행히 AI 선생이 있어 국후 복기 때 코치를 받을 수 있다. 내 약점은 전투와 사활이다. 무엇이나 마찬가지지만 바둑 역시 공부를 하지 않으면 늘지 않는다.

 

수십 판을 두어보니 이제는 인터넷 바둑도 어느 정도 적응이 된다. 그래도 시간 부족에 대한 아쉬움은 여전하다. 바둑이 중반을 지나면 나는 대개 초읽기에 몰린다. 허둥대다가 실수하는 일이 잦다. 바둑은 하루에 한판만 두기로 원칙을 정했다. 너무 빠지지 않게 경계하기 위함이다.

 

바둑의 장점은 집중과 몰입이다. 바둑을 둘 때는 오직 수읽기에만 몰두하게 된다. 옆에서 전쟁이 나도 모른다. 실제로 일본에서 2차대전 중 미군기의 공습으로 폭탄이 터지는데도 아랑곳없이 대국했다는 일화가 있다. 어젯밤에 바둑을 두고 거실에 나갔더니, 위층에서 난리를 피웠는데 괜찮았느냐고 아내가 물었다. 나는 소리에 무척 예민한 데도 전혀 몰랐다. 바둑을 둘 때는 그만큼 정신을 모으고 집중하게 된다. 기도(棋道)의 의미도 이런 몰입과 연관이 있지 않나 싶다.

 

며칠 전에 한국기원에서 입단대회가 있었는데 AI 커닝 사건이 일어났다. 옷 단추에 소형 카메라를 달고 바둑판을 전송하면, 밖에서 AI가 가르쳐주는 수를 귀에 꽂은 리시버로 보내주었다. 영화 '신의 한 수'에 나오는 내기바둑의 술수가 그대로 재현된 것이다. 사람 고수에서 AI로 바뀌기만 했다. 현재 AI 실력은 인간 최고수가 두 점을 접어야 할 정도로 막강하다. 인공지능이 우리 옆에까지 왔음을 실감한 어처구니없는 사건이었다.

 

지금은 어쩔 수 없이 인터넷으로 바둑을 두지만, 언젠가는 기원에서 얼굴을 맞대고 바둑을 둘 수 있는 친구가 생겼으면 좋겠다. 돌을 하나 집어 들고 바둑판 위에 통, 하고 놓아본다. 판과 돌이 부딪치는 소리의 울림이 아늑하다. 아날로그에 대한 그리움이다.

 

'길위의단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다람쥐가 되어 간다  (0) 2020.02.06
설날 세 장면  (0) 2020.01.27
세상에서 제일 공평한 것  (0) 2020.01.05
근육 기르는 재미  (0) 2019.12.28
2019 왕립학회 과학사진  (0) 2019.1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