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본느낌

먼 바다

샌. 2020. 12. 5. 14:35

공지영 작가의 장편소설로 시간이 흘러도 지워지지 않는 첫사랑의 기억에 관한 이야기다. 여교수인 미호는 SNS를 통해 연락이 닿은 요셉을 미국 여행길에 뉴욕에서 만난다. 40년 전 그들은 여고생과 신학생으로 성당에서 만난 첫사랑이었다. 대부분의 첫사랑이 그렇듯 우여곡절을 겪으며 둘은 헤어진다. 그건 오해였을 거야, 라는 아쉬움과 함께 첫사랑은 오래 기억된다. 미호가 첫사랑을 만나려는 것은 가슴 속 응어리를 풀고 싶은 바람이 있었는지 모른다.

 

<먼 바다>을 읽으면서 누구나 자신의 첫사랑을 떠올릴 것이다. 아픔도 있겠지만 추억하는 첫사랑은 아련하면서 달콤하다. 그러나 첫사랑과의 재회가 꼭 그러하리라는 보장은 없다. 전화번호가 적힌 쪽지를 손에 들고 무수히 망설이다가 결국은 포기했던 적이 있다. 만약 지금 다시 기회가 주어진다면 다른 선택을 할 것 같다. 아니 만났어야 좋았다고 후회를 할지라도.

 

사랑 이야기만 아니라 이 책에서는 공지영 작가 특유의 표현법을 보는 재미도 있다. 요셉이 피아노 치는 소리를 들으며 '우유 데우는 냄새가 났다'고 묘사한 문장에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소리의 느낌을 후각과 연결한 표현은 정말 기발하다. 또, 바다의 석양은 이렇게 그려낸다.

"배를 타고 30분쯤 나갔지요. 바람이 좀 불어서 배가 많이 흔들렸지만 충분히 아름다운 석양을 봤어요. 바다에 석유를 뿌리고 불을 질러버린 것 같았어요. 마요네즈 약간 섞어서 막 휘저은 오렌지주스 빛." 와, '마요네즈 약간 섞어서 막 휘저은 오렌지주스 빛'이라니.

 

소설에 나오는 인물 중에서는 미호의 어머니가 독특하다. 가족을 위해 헌신하고 희생하는 표준화된 모성과는 거리가 먼 여성이다. 미호와의 관계가 멀어진 원인이기도 하지만, 지적이고 독립적인 당당함이 인상적이다. 소설 끝에는 어머니의 입을 통해 인생의 깨우침을 전한다. <먼 바다>가 주는 메시지이기도 하다. 이때 미호는 처음으로 어머니가 아름답다는 생각을 한다.

 

"돌아보니까, 아픈 것도 인생이야. 사람이 상처를 겪으면 외상 후 스트레스성 장애라는 것을 겪는다고 하고 그게 맞지만, 외상 후 성장도 있어. 엄청난 고통을 겪으면 우리는 가끔 성장한단다. 상처가 나쁘기만 하다는 것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거야. 피하지 마. 피하지만 않으면 돼. 우린 마치 서핑을 하는 것처럼 그 파도를 너머 더 먼 바다로 나갈 수 있게 되는 거야. 다만 그 사이에 날이 가고 밤이 오고 침묵이 있고 수다가 있고 그런 거야. 젊어서는 죽었다 깨어나도 이걸 깨닫지 못해. 하지만 이제 너도 오십이 훨씬 넘었고 이제는 이해할 수 있을 거야. 너무 많이는 아파하지 마. 그러면 상하고 늙어 살도 찐단다."

"많이도 미워하고 많이도 원망했었다. 그러나 이만큼 살고 죽음이 더는 두렵지 않은 나이가 되고 보니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사랑한다고 말하고 미워하는 사람에게는 날씨가 춥죠? 하고 인사하고...., 살아보니 이 두 마디 외에 뭐가 더 필요할까 싶다. 살아보니 이게 다인 것 같아, 미호야."

 

인간은 아픔을 견디고 사는 존재인지 모른다. 이루어지지 못한 첫사랑의 아픔과 상처도 마찬가지다. 돌아보면 그 시절은 실수와 미숙으로 얼룩져 있어 보인다. 그러나 그런 과정을 통해 우리는 지금의 나로 성장해 왔다. 상처의 쓰라림 없이 우리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존재가 아닐까.

 

책 뒤의 '작가의 말'은 이렇게 시작한다.

 

누군가 글 쓰는 데 필요한 조건을 묻길래 내가 대답했었다.

고통과 고독과 독서, 이 세 가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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