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본느낌

퀸스 갬빗

샌. 2020. 12. 8. 11:38

 

'메시아'와 '빨간 머리 앤'에 이어 세 번째로 본 넷플릭스 드라마다. 요사이 넷플릭스 때문에 드라마의 재미에 푹 빠졌다. TV의 영향이겠지만 '막장'이라는 선입견으로 드라마를 외면했는데, 잘 만든 드라마는 영화 이상의 감동을 준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한 인간의 성장기를 다루는 내용은 영화보다는 드라마가 더 적합하다는 생각이 든다.

 

'퀸스 갬빗(The Queen's Gambit)'은 체스의 천재인 고아 소녀가 세계 최고의 자리에 오르기까지의 과정을 그린 7부작의 인생 드라마다. 제목으로 쓰인 '퀸스 갬빗'은 체스 용어라고 한다. '갬빗(gambit)'은 사전에서 찾아보니 '체스에서 기선을 제압하려고 폰을 희생시키는 초반의 수'라고 나와 있다. 주인공이 퀸이 되기까지의 과정을 함축한 의미가 들어 있는 것 같다.

 

이 드라마에서는 주인공인 엘리자베스 하먼 역을 맡은 여배우(Anya Taylor-Joy)의 연기가 일품이다. 드라마 성공의 반은 이 매력적인 여배우 덕으로 보인다. 포스터에 나오는 모습은 상대를 궁지에 몰아넣고 자신만만하게 바라볼 때 짓는 자세다. 하먼은 남성 중심의 체스 세계에 뛰어들어 주눅 들지 않고 당차게 도전한다. 그녀의 솔직하며 당당한 모습이 인상적이다.

 

나는 체스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는데 이 드라마를 보고 나서 '체스인사이드'라는 사이트에 들어가서 기초 설명을 보았다. 원리는 대체로 장기와 비슷하다. 기물은 6종인데 장기의 졸에 해당하는 것이 폰(pawn)이고, 룩(rook), 나이트(knight), 비숍(bishop), 퀸(queen), 킹(king) 등이 있다. 기물은 각각 진행하는 규칙이 있고, 킹이 잡히면 판이 끝난다. 드라마에서 '체크'라는 말이 자주 나오는데, 이는 장기에서 '장군'이라고 부르는 것과 같다. 장기를 잘 두는 사람은 훨씬 빨리 배울 것 같다.

 

하먼은 결국 세계 최고수를 꺾고 정상에 선다. 그 과정에서 번민과 고통, 우여곡절이 많았다. 하먼은 아버지가 떠나고 어머니는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현장에서 살아남은 트라우마가 있는 소녀였다. 보육원에서 건물 관리인으로부터 우연히 체스를 접하고 거의 독학으로 자신의 길을 개척해 나간다. 실화가 아닌 가상의 이야기지만 한 인간의 분투와 꿈을 이루어가는 과정이 감동을 준다.

 

우리나라는 체스 대신 바둑이 인기다. 그런데 제대로 된 바둑 영화가 나오지 않은 것은 유감이다. '퀸스 갬빗'을 보면서 더욱 그런 생각이 들었다. '신의 한 수'는 이 드라마에 비하면 비교 대상이 안 된다. 바둑을 통해서 인간 세계의 갈등을 극복하며 내면의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퀸스 갬빗' 같은 바둑 영화가 나오기를 기대한다.

 

드라마의 마지막에서 하먼은 공항으로 가는 대신 할아버지들이 모여 체스를 두는 러사아의 길거리를 찾아간다. 세계 챔피언을 알아본 할아버지들은 좋아하고, 하먼은 이름 모르는 한 할아버지와 체스 대국을 벌인다. 아마 이때 하먼은 자신에게 체스를 가르쳐 준 보육원 시절의 샤이벌 할아버지를 떠올렸을지 모른다. 이 마지막 장면도 가슴을 찡하게 만든다. 냉혹한 승부 세계를 다루면서 따스한 인간애가 녹아 있는 멋진 드라마 '퀸스 갬빗'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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