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나온 은희경 작가의 장편소설이다. 작가는 자전소설에 장기가 있어 손에 잡힐 듯 생생하게 과거를 재현한다. 이 소설은 1977년에 대학에 입학하여 시작한 기숙사 생활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나도 같은 70년대에 대학을 다녔으므로 비슷한 시대 환경을 경험했다. 그래서 더욱 공감할 수 있었고, 그 시절로 시간 여행을 할 수 있어 좋았다.
은희경 작가의 문장은 입에 착착 달라붙는 듯 감칠맛이 난다. 감성적인 여성 작가의 특징을 여실히 보여준다. 한 권의 책을 단 한 차례도 지루하지 않게 읽기가 드문 데 작가의 글은 그렇지 않다. 빨리 끝날까 봐 두려울 정도로 이야기에 빠져드는 마력이 있다.
그중에서 작가가 사랑에 빠졌을 때를 묘사한 아름다운 부분은 이렇다.
1977년의 6월과 7월은 일생에서 내가 가장 예뻤던 때일 것이다. 그때 나는 아침이 밝아오는 순간과 함께 깨어나는 설렘의 조도를 알았고, 저녁 미풍 속에 깃든 저물어가는 쓸쓸함의 음영을 알았다. 비가 뿌리기 전에 끼쳐오는 흙냄새와 기숙사 탁구대에서 들려오는 공 소리의 선명한 메아리를 알았다.
그와 함께 걸었던 모퉁이들의 햇살과 나무 그림자와 흘러가는 구름의 움직임을 알았다. 그와 나눠 마시던 평범한 커피의 향기와 찻잔의 온도와 손잡이가 놓여 있던 각도, 입술에 닿던 얇거나 두툼한 감촉을 기억했다. 그의 주변을 감싸고 있던 공기와 실내 벽의 색감과 담배 연기의 궤적과 잘 마른 옷감의 냄새, 그의 곁을 스쳐 가던 격정적이거나 고요한 음악들, 버스 정류장의 소음과 발소리와 나직한 말소리들, 물끄러미 창밖을 바라볼 때 그의 무겁고도 허전한 눈빛과 감정이 들어간 손가락의 섬세한 반동을 알았다.
그리고 나와 눈을 맞추었을 때 마치 뭔가를 건네받기라도 한 듯 한순간 내게 밀려들던 뜨거움과 갈증도.
우리는 자주 걸었다. 남산과 정동길, 고궁, 오래된 동네의 골목들, 결이 좋은 갈색 머리카락에 얼굴이 희고 마른 체형인 그는 늘 티셔츠와 진 바지에 농구화를 신었다.
아버지 생일이라 내가 고향 집에 다녀왔던 날 그는 서울역 대합실로 마중을 나왔다. 갑자기 비가 쏟아졌고 시계탑 옆에서 비닐우산을 파는 소녀들이 빗속을 뛰어다니며 여행객들을 붙들었다. 소녀들은 흠뻑 젖어있었다. 우산을 사러 광장으로 뛰어나간 그를 기다리며 대합실 입구에 서 있던 나는 그가 우산 두 개를 사는 걸 보고 조금 실망했다. 그러나 그는 그중 한 개를 펴서 우산팔이 소녀에게 들려주고 나머지 우산을 활짝 펼쳐 든 채 내게로 다가왔다. 그의 우산 속으로 뛰어들었을 때 그에게서는 비에 섞인 땀냄새가 났고 반팔 옷 아래로 닿는 팔의 감촉은 축축하고 서늘했다. 그러고는 이내 따뜻해졌다.
1970년대는 박정희의 철권통치 시대였다. 권위적인 사회 분위기는 학교라고 예외가 아니었다. 학교는 반공과 애국 이념을 주입하는 병영이었다. <빛의 과거>에는 작가가 경험한 학창 시절의 슬펐던 얘기가 자주 나온다. 남학생에게도 벅찼던 교련이 여학생에게는 어땠을까. 우리도 뙤약볕에서 몇 시간 동안 열병 훈련을 받고 교실에 들어오면 녹초가 되었다. 대학교에 들어갔을 때는 교련 폐지가 데모의 주 이슈였다.
여성은 세상을 어떻게 보는지 궁금할 때가 있다. 같은 사람이지만 여자와 남자는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같지 않다. 뇌가 세상을 인식하는 패턴이 다르게 되어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여자가 남자를, 또는 남자가 여자를 온전히 이해한다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이 소설에는 기숙사에서 함께 생활하는 여덟 명의 여학생이 나온다. 그들의 삶에서 여자들의 세계를 엿볼 수 있어 흥미로웠다. 남자들에 대한 선입견이 무엇인지도 알 수 있었는데, 여자나 남자나 모두 착각 속에서 이성(異性)을 바라보는 것 같다.
우리가 추억하는 과거는 '나'라는 프리즘에서 굴절된 것이다. <빛의 과거>에서도 서로간의 기억에 차이가 있음을 보여준다. 누가 옳고 그름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는 각자가 자기의 세계를 만들어가고 있는지 모른다. 작가는 소설 속 김희진을 통해 이렇게 말한다.
"진실이 어디 있어. 각자의 기억은 그 사람의 사적인 문학이란 말 못 들어봤니?"
"우리가 아는 자신의 삶은 실제 우리가 산 삶과는 다르며 이제까지 우리 스스로에게 들려준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
<빛의 과거>를 읽는 시간은 그 시절의 나를 만나는 시간이었다. 내가 기억하는 그 시절 역시 내가 만들어낸 이야기일지 모른다. 그러니까 왠지 더 따스해지는 느낌은 뭘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