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본느낌

소르본 철학 수업

샌. 2020. 11. 14. 12:02

작가는 고등학교 졸업식장에서 "명품 인간이 돼라"는 교장 선생님의 말씀을 낯설게 느낀다. '인간'과 '명품'이 서로 등치 될 수 있는 것일까? 한때는 정부에서 교육인적자원부라는 명칭을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사용하기도 했다. 세상의 당연함에 회의를 품었던 소녀는 프랑스 파리로 철학 공부를 하러 떠난다. 이 책 <소르본 철학 수업>은 자의식에 눈 뜨면서 세상의 관념에 맞서 싸우며 나아가는 한 인간의 성장기라고 할 수 있다.

 

전진 작가는 2015년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파리로 날아갔다. 2년의 어학 코스를 밟은 뒤, 2017년에 파리 제1대학 철학과에 입학하고 3년 만에 졸업했다. 지금은 같은 대학원 철학과 미술사학부에서 미학을 공부하고 있다.

 

요즈음 공부 잘하는 똑똑한(?) 아이들은 대개 의대나 법대를 간다. 우리 때만 해도 이과에서 상위권에 있으면 물리과가 목표였다. 순수학문은 돈이 안 되지만 젊음이 도전할 가치가 있다고 다들 믿었다. 이젠 세상이 달라졌다. 그래서 영민한 학생이 철학을 공부하겠다고 하면 천연기념물을 보는 것 같다. 이 책을 고른 이유도 그런 반가움 때문이다.

 

작가는 성장의 역순으로 자신의 과거를 드러내며 왜 지금의 나에 이르게 되었는지를 보여준다. 책 말미에 우연과 필연에 대한 작가의 소견이 적혀 있는데, 철학을 공부하게 된 것은 어쩌면 작가의 운명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만약 국내에서 대학에 들어갔더라도 어떤 우여곡절을 거쳐서든 철학의 길에 들어서지 않았을까. 삶의 에피소드들이 한 곳으로 수렴하는 것으로 느껴진다. 그만큼 철학을 사랑한다는 말이겠지.

 

책에는 대학 생활과 새로운 공부 방법과 함께 프랑스인들의 깨인 의식도 소개한다. 인권과 자유를 기반으로 하는 프랑스 정신은 새겨듣고 본받을 만하다. 우리 사회가 프랑스나 독일과 같은 유럽 모델을 받아들였다면 지금과 같은 난장판은 되지 않았을 것이다. 프랑스를 보여주는 글 중 한 대목이다.

 

"프랑스 사회는 노력하는 개인에 집착하지 않는다. 단편적인 예를 들자면, 프랑스 베스트셀러 목록에는 자기계발서가 없다. 진짜 출간되는지도 의심스럽다. 47번째쯤에서야 미셸 오바마의 자서전이 눈에 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네가 뭔데 날 가르쳐'라는 오만한 성깔도 한몫하지만 이들에게 책이란 역시 문학이다. 사실 프랑스인들은 '자기' 계발로는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음을 잘 알고 있다. 노력해도 살기가 힘들다면 그건 자신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의 문제니까. 대물림되는 엘리트주의가 공공연히 자리잡은 프랑스에서 양적 노력으로 계급 상승을 꿈꾼다면 비웃음을 사기 쉽다. 사는 법을 모른다고. 세상에 아름다운 게 얼마나 많은데. 이런 태도가 노력의 좌절과 체념에서 비롯되었다고 하기엔 적당히 노력해도 살 만한 사회인 것도 사실이다. 일요일 오후의 공원 산책이 불안하지 않은 사회 말이다. 그렇게 아등바등 애를 썼는데도 앞길이 막막하다면 자기계발서를 찾기보단 길에 나선다. 그곳엔 이미 먼저 나온 시위대가 있다. 개인의 좌절이 사회의 목소리가 될 때 위로도 함께 받는다. 프랑스에 힐링 서적이 없는 이유다."

 

작가는 공부만 아니라 모든 면에서 패기 있고 열정적이다. 세상을 대하는 도전적인 자세가 부럽다. 끼나 재주 또한 대단한 것 같다. 고등학생 때 만든 마초맨을 흉내 낸 유튜브 영상을 보고 많이 웃었다. 지금은 '시롱새'라는 이름으로 파리 생활을 소개하는 유튜브 방송을 시작했다. 구독자 수에 신경 쓰기보다는 파리 현지의 젊은이가 들려주는 수준 높은 철학 이야기 콘텐츠를 만들어주기를 당부하며, 학문의 길에서 더욱더 정진하길 빈다.

 

"세상을 바꾸기엔 벅차지만, 자신을 바꾸기엔 충분한 나에게" - 이 책의 부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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