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본느낌

다읽(7) - 거꾸로 사는 재미

샌. 2020. 11. 9. 11:06

1983년에 펴낸 이오덕 선생의 수필집이다. 주로 70년대에 선생이 쓴 글이 주제별로 모여 있다. 1부는 자연, 2부는 삶에 대한 성찰, 3부는 시론(時論), 4부는 교육 수상이다.

 

선생의 글은 가식이 없고 진솔해서 좋다. 기교를 부리거나 장식 많은 글이 아니다. 선생의 고결한 성품이 배어 있다. 담박한 글맛을 느끼기에 아주 좋다. 겉 포장에 능숙한 시대에 선생의 글을 읽으면 더운 여름에 시원한 바람을 쐬는 것 같다.

 

내가 다시 꺼내서 읽어본 <거꾸로 사는 재미>는 2006년에 산처럼 출판사에서 펴낸 것이다. '거꾸로 사는 재미'라는 제목이 언제나 마음을 끈다. 세상의 흐름과 다르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은 내 흥미를 자극하기 때문이다. 거꾸로 살아가면서 재미까지 더해진다면 이미 보통 경지에 오른 분이 아닐 것이다. 이오덕 선생, 전우익 선생, 권정생 선생, 장일순 선생은 삶의 모습으로 존경했던 분들이시다. 이제는 모두 돌아가시고 이 세상에는 안 계신다.

 

책 제목으로 사용된 선생의 글을 한자한자 정성들여 옮긴다.

 

 

 

거꾸로 사는 재미 / 이오덕

 

나는 설날에 차를 타고 여행하기를 즐긴다. 도시 사람들이 서로 다투어 시골로 나오려고 할 때 나는 반대로 도시로 들어가고, 다시 사람들이 도시로 모여들 때면 나는 시골로 돌아온다. 그러면 그토록 기막힌 교통지옥도 내게는 해소되어 유유히 차 타는 즐거움을 누리는 것이다. 스물 몇 해 전이던가, 음력 설날 어느 시골에서 ㅂ시로 가는데, 나 혼자를 위해 기차가 운행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때부터 설날 여행의 재미를 들인 것 같다. 요즘은 설날이라도 그렇게 빈 차는 아니지만, 그래도 평소 때보다는 훨씬 조용하다.

 

산골 학교 숙직실엔 저녁마다 온 직원들이 모인다. 모두가 도시에다 가족을 두고 온 사람들이다. 이들의 대화 속에 거의 날마다 빠질 수 없는 것이 언제 산골에서 벗어나나 하는 것이다.

"난 토요일만 되면 집에 갈 생각에 아침부터 들떠 있어요."

"일요일 오후 버스를 타고 이놈의 골짝을 들어오는 게 죽으로 오는 것같이 싫어요."

 

벌써 마흔이 넘고, 혹은 쉰이 넘은 사람들의 입에서 나오는 순진한 말이다. 나는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딱한 생각이 들어 어쩔 수 없다.

"좀 달리 생각할 수 없는가요? 요즘 돈 많은 사람들, 산골에 별장 지어 놓고 도시에 다니지요. 또 관광 다닌다고 돈 쓰며 여행하는 사람들 얼마나 많은가요? 일주일에 한 번씩 여행한다 생각하면 오히려 즐거울 수도 있습니다."

이건 동료들을 달래기 위해 내가 입으로만 지껄이는 말이 아니라 진정에서 나온 말이다. 왜 이들은 자기를 스스로 멸시하며 살아가는 것일까?

 

사람들이 끝없이 가고 있다. 어른, 아이,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온통 길을 메워 뽀얀 먼지 속을 사람의 강물이 흘러간다. 이들은 방금 주차장에서 내려 어느 유원지로 가는 것이다. 그 주차장까지 차를 타고 온 것만 해도 몇 시간을 서로 다투고 아우성치고 했다. 그런데 이 많은 사람들을 받아들일 자리가 어딜까? 서로 부딪치고 발을 밟고 밟히면서 밀고 밀려가기를 지치도록 하다가 이윽고 무슨 자연공원인가 하는 현판이 붙은 문 앞에 가서 또 땀을 닦으면서 반 시간이 넘게 줄을 서서 기다려 겨우 입장권을 산다. 천당 가는 입장권을 이렇게 산다 해도 반갑지 않은데 거기 들어가니 또 지옥이다. 어딜 가도 사람의 사태요, 짓밟히고 발에 걸리는 비닐봉지와 유리병이다. 골짜기 물은 더러워 들여다보면 기분이 나쁠 정도고, 아이들이 돈 내고 타는 노리개 차도 워낙 사람이 많아 탈 수 없고, 동물원의 새들은 날개가 잘려 날 수 없게 되어 있다. 이게 대도시의 공원이요, 놀이터다. 그래도 아이고 어른이고 도시에 산다는 것, 이런 델 한번 와보는 것이 영광인 모양이다. 도시에 살아도 이런 곳에 오지 못하는 가난한 아이들은 학교에 가서도 기가 죽어 있다. 이곳에 가족을 데려와 보지 못한 아버지들은 못난 사람이 된다.

 

자욱한 먼지 속을 남 따라 가고 있는 넋 빠진 인간들, 관광에 유람에 미쳐 있는 인간들의 물결 속에 휩쓸려가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아이들과 가족에 졸려 지옥에 가고 있는 못난 나 자신을 때때로 발견하고 몸서리친다. 나는 탈주해야 한다. 이 미친 무리들의 행렬 속에서 탈주해야 한다.

 

거꾸로 살기를 즐기는 사람도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있지 않으면 어느 틈에 거대한 기계 속에 휘말려 들어가 비참한 꼴이 되는 세상이다. (197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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