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읽기' 여섯 번째는 <백범일지>다. 20년 전쯤에 이 책을 처음 읽고 백범 선생의 인물됨에 크게 감명받았다. 독립운동을 한 정치가 정도로 알고 있었는데, 선생의 나라 사랑과 조국에 헌신한 삶을 접하고 경탄과 함께 가슴이 뛰었다. 다시 읽어봐도 마찬가지다. 선생은 영웅호걸의 면모를 갖춘 분이다.
역사에서 가정은 별 의미가 없지만, 만약 선생이 우리나라 초대 대통령이 되어 나라를 이끌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지도자로 누굴 만나느냐에 따라 국가의 흥망성쇠가 좌우되는 경우가 많다. 그런 점에서 선생이 반대파에 의해 암살당한 것은 대한민국의 초석을 다지는 절호의 기회를 놓친 것이나 다름이 없다. 그때 잘못 끼운 단추로 인해 아직도 '역사 바로 세우기'라는 말이 나오고 있다.
<백범일지>에는 구한말과 일제 강점기 시대에 조국을 구하고자 일신을 희생한 수많은 지사들이 나온다. 의병을 비롯한 다양한 구국 활동이 있었음을 알게 된다. 선생이 잘 쓰는 표현인 '의기남아(義氣男兒)'들이 이곳저곳에서 등장했다. 반면에 나라가 망하든 말든 관심 없이 제 잇속만 챙기는 '밥벌레[穀蟲]'도 많았다. 아니 대다수였는지 모른다. 선생은 교육을 통해 국민 의식을 깨우치려 애쓰다가 1919년에 중국으로 건너가 임시정부를 세웠다. 이 시기에 선생은 결심의 표시로 이름을 '구(九)'로, 호는 '백범(白凡)'으로 바꾸었다. 백범은 백정(白丁)과 범부(凡夫)들이라도 애국심이 당신 정도는 되어야 완전한 독립국민이 될 수 있다는 바람 때문이었다고 한다.
책에는 재산과 목숨을 바쳐 독립운동을 한 지사들의 영웅적인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이재명, 이봉창, 윤봉길 의사 등은 선생이 직접 뽑고 의거를 기획했다. 또한 이런 의사들 뒤에는 함께 고생하는 가족이 있었다. 선생이 대가족으로 부르는, 임시정부를 따라다니며 도운 그룹이 500명 정도 된 것 같다. 이들의 고초가 어떠했을지 지금 우리는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일신의 안위나 걱정하며 살아가는 내 좁쌀 같은 삶이 가련해진다.
자식 뒤에는 위대한 어머니가 있는 법인가, 선생을 지켜보며 격려한 어머니의 굳센 의지를 보면 머리가 숙여진다. 감옥에 갇힌 아들을 여덟 달 만에 면회하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는 네가 경기 감사나 한 것보다 더 기쁘게 생각한다." 또한 생신 때 동지들이 준 돈을 받은 어머니는, 권총을 사서 일본놈을 죽이라고 청년단에 보냈다고 한다.
선생은 위대한 독립운동가이지만 문재도 뛰어난 것 같다. 책에 나오는 인명이나 사건을 보면 기억력도 비상하시다. 그중에서도 제일 명문은 끝에 나오는 '나의 소원'이다. 두 부분만 옮긴다.
"네 소원이 무엇이냐?" 하고 하나님이 물으시면, 나는 서슴치 않고 "내 소원은 대한 독립이오" 하고 대답할 것이다. "그 다음 소원은 무엇이냐?" 하면, 나는 또 "우리나라의 독립이오" 할 것이요. 또 "그 다음 소원이 무엇이냐?" 하는 셋째번 물음에도, 나는 더욱 소리를 높여서 "나의 소원은 우리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독립이오" 하고 대답할 것이다.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아니한다. 우리의 부력(富力)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强力)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겠기 때문이다. 지금 인류에게 부족한 것은 무력도 아니오, 경제력도 아니다. 자연과학의 힘은 아무리 많아도 좋으나, 인류 전체로 보면 현재의 자연과학만 가지고도 편안히 살아가기에 넉넉하다. 인류가 현재에 불행한 근본 이유는 인의(仁義)가 부족하고, 자비가 부족하고, 사랑이 부족한 때문이다. 이 마음만 발달이 되면 현재의 물질력으로 20억이 다 편안히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인류의 이 정신을 배양하는 것은 오직 문화이다. 나는 우리나라가 남의 것을 모방하는 나라가 되지 말고, 이러한 높고 새로운 문화의 근원이 되고, 목표가 되고, 모범이 되기를 원한다. 그래서 진정한 세계 평화가 우리나라에서, 우리나라로 말미암아서 세계에 실현되기를 원한다.
선생이 가슴 아파했던 남북 분단이 70년 넘게 계속되고 있다. 아마 선생도 이렇게까지 오래 민족이 갈라서 있으리라고는 상상조차 못 했을 것이다. <백범일지>는 특히 요사이 젊은이들에게 강력히 추천하고픈 책이다. 잔 일상에 매몰되지 말고 배포 큰 사람이 되라는 교훈으로 이보다 더 좋은 책은 없다고 생각한다.
내가 읽은 책은 돌베개 출판사에서 2002년 개정판으로 나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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