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본느낌

우리의 불행은 당연하지 않습니다

샌. 2020. 11. 3. 12:08

세계 무대에서 우리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는 거울 같은 책이다. 우리나라는 작년에 세계에서 가장 크고 부유한 나라만 들어갈 수 있다는 '30-50 클럽'(1인당 국민소득 3만 불 이상, 인구 5천만 명 이상인 나라)에 들어간 일곱 번째 나라가 되었다. 미국, 일본,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그리고 한국이다. 대한민국은 경제적 성취와 정치적 민주화에서는 세계에서 독보적인 나라다.

 

반면에 '헬조선'이라는 말처럼 불명예의 기록도 다수 가지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자살률이 높고, 노동시간이 가장 길고, 불평등이 가장 심하고, 아이들이 가장 우울하고, 아이들을 가장 적게 낳고, 제일 서로를 불신하는 나라다. 이 정도면 지옥이라 할 만하다. 어느 외국 학자는 한국 사회의 특징을 '끝없는 경쟁, 극단적 개인주의, 일상의 사막화, 생활 리듬의 초가속화'로 짚었다.

 

<우리의 불행은 당연하지 않습니다>는 김누리 선생이 대한민국의 현 모습을 다른 나라, 그중에서도 독일의 경우에 비추어 본 책이다. 부제가 '대한민국의 불편한 진실을 직시하다'이다. JTBC의 '차이나는 클라스'라는 프로에서 한 강의를 엮었다고 한다.

 

이런 이상한 나라가 된 원인을 선생은 세계를 휩쓴 68혁명의 부재에서 찾는다. 68혁명은 60년대 중반 이후 나타나 70년대 초반까지 계속된 세계사적인 거대한 변혁의 흐름이었다. 모든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을 내건 68혁명은 세계의 문화혁명이었다고 할 수 있다. 68혁명으로 유럽, 특히 독일은 완전히 새로운 나라가 되었다. 유독 우리나라만 이런 68혁명의 흐름에서 차단되었다. 박정희 철권통치는 반대로 우리나라를 병영국가로 만들었다. 주민등록 제도, 국민교육헌장 반포, 예비군 조직, 학생 교련 실시 등으로 국민을 통제했다. 현재 우리 사회가 앓고 있는 병의 기원을 추적하면 영락없이 박정희와 만나게 된다.

 

68혁명 경험의 부재는 우리나라를 인권 감수성의 부재, 소비주의 문화의 창궐, 권위주의 사회, 자기 착취와 소외 현상, 성도덕 부재 등의 폐해를 낳았다. 우리나라의 자본주의는 자본주의 중에서도 가장 야만적인 약탈 자본주의의 전형이다. 사회적 민주주의는 달성했으나 국민 의식의 민주주의는 아직 요원하다. 건강한 민주시민은 아직 길러지지 않았다. 광장을 촛불로 물들여도, 정권을 교체해도 우리의 현실이 제자리걸음인 이유다.

 

책에는 우리 사회의 여러 병리적 현상을 해부하고 진단한다. 그중에서 우리 정치 현상을 표현하는 용어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데 동의한다. 모든 언론은 우리의 정치 구도를 보수와 진보의 대결로 적는다. 이것은 기득권이 만들어낸 최대의 거짓말이다. 우리나라는 한 번도 보수와 진보가 경쟁한 적이 없다. 수구와 보수가 손을 잡고 권력을 분점해 온 구도다. '수구-보수 과두지배'라고 해야 맞다.

 

자칭 보수라 칭하는 자들은 사실 보수가 아니라 수구다. 수구란 자신의 개인적 이익을 위하여 외세와 손잡고 기회주의적으로 행동하는 무리들이다. 보수가 추구하는 가장 중요한 가치는 공동체다. 한국에서 공동체를 중시하면 빨갱이라고 공격한다. 소위 진보라는 민주당 계열은 진보와는 한참 거리가 먼 정파다. 문재인 정부가 펼치고 있는 노동, 경제, 복지정책을 보면 알 수 있다. 독일의 보수당 대표인 메르켈의 입장에서 본다면 문재인 정부는 보수 중에서도 한참 보수다. 이런 왜곡된 언어를 바로잡아야 우리 정치 현실을 개선해 나갈 수 있다.

 

그런 관점에서 '조국 사태'를 바라보는 시각도 신선하다. 조국 사태를 키운 것은 본질적인 동질성을 가진 두 정치 세력이 이를 은폐하기 위해 대립을 극적으로 과장하는 하나의 거대한 연극이라는 것이다. 수구와 보수의 내면 깊숙한 곳에는 거대한 불안이 자리잡고 있다. 한국 정치를 양분하고 있지만 차이는 허구적이기 때문에 실상을 가리려고 싸움의 양상은 거칠고 과격할 수밖에 없다.

 

한국은 전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극단적으로 우경화된 정치 지형을 가진 나라다. 한국에서는 한 번도 보수와 진보가 경쟁한 적이 없다. 수구와 보수의 권력 나눠먹기만 있었을 뿐이다. 이것이 한국 사회가 오늘날 정치 민주화와 경제성장, 정권 교체에도 불구하고 '헬조선'이 된 근본적인 원인이다.

 

<우리의 불행은 당연하지 않습니다>는 이런 기만적인 정치 지형부터 경제, 교육, 분단체제까지 거대한 늪에 빠진 '한국형 불행'의 근원을 파헤친다. 우리가 당연시하는 많은 것이 부조리하고 정의롭지 못하다는 것을 날카롭게 분석한다. 우리의 현실을 제대로 알아야 앞으로 한국 사회가 나아갈 방향을 올바르게 정할 수 있다. 꼭 한 번씩 읽어보길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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