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136

속물

어느 모임에 나갔다가 한 여인네가 하는 얘기를 들었다. 요약하면 이렇다. "하나님은 간절한 기도를 들어주시는 분이시잖아요. 그래서 내 첫사랑을 만나게 해 달라고 기도했죠. 정말 응답이 왔어요. 어느 날 도로를 달리는데 그 사람이 우연히 눈에 띈 거예요. 가슴이 두근거리고 너무 반가웠어요. 거의 30년 만이죠. 한눈에 알 수 있다는 게 신기했어요. 물론 그 사람은 날 보지 못했어요. 서로 다른 차에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그가 남양주 IC로 빠져나가는 거예요. 그때는 퇴근시간이었어요. 그가 남양주에 사는 게 틀림없어 보였어요. 그런 생각이 드니 갑자기 내 가슴이 싸늘하게 식는 거예요. 만나고 싶은 마음도 싹 사라졌어요. 그 나이에 남양주에 살 정도면 어떻겠어요?" 여러 사람 앞에서 이런 식으로 당당히 말하는..

길위의단상 2014.11.14

졸업

EBS 명화극장에서 방송된 영화 '졸업'을 다시 보았다. 이 영화를 처음 본 건 1970년대 초반의 대학생이었을 때였다. 40년이 지난 지금도 기억나는 몇 개 장면과 함께 잊혀지지 않는 영화로 남아 있다. '졸업'으로 인해 더스틴 호프만을 좋아하게 되었고, 사이먼과 가펑클의 노래도 마찬가지였다. '스카보로 페어'가 흐르는 가운데 빨간 스포츠카를 타고 달리는 장면은 잊혀지지 않는다. 밤늦게 시작된 영화지만 옛날 생각에 잠긴 채 재미있게 보았다. 젊었을 때는 어떻게 느꼈는지 모르지만, 지금 보니 세대간의 갈등이라는 측면이 부각되어 보인다. 물질적 풍요를 이룬 미국 중산층의 정신적 공허는 그대로 젊은이들에게 영향을 미친다. 부모 세대가 요구하는 현실과 삶의 의미 사이에서 방황하는 젊은이의 모습이 사랑을 찾아가..

읽고본느낌 2014.10.18

알몸 노래 / 문정희

추운 겨울날에도 식지 않고 잘 도는 내 피만큼만 내가 따뜻한 사람이었으면 내 살만큼만 내가 부드러운 사람이었으면 내 뼈만큼만 내가 곧고 단단한 사람이었으면 그러면 이제 아름다운 어른으로 저 살아 있는 대지에다 겸허히 돌려드릴 텐데 돌려드리기 전 한 번만 꿈에도 그리운 네 피와 살과 뼈가 만나서 지지지 온 땅이 으스러지는 필생의 사랑을 하고 말 텐데 - 알몸 사랑 / 문정희 화끈한 사랑의 시인이다. 문정희 시인은 불꽃보다 더 뜨거운 정열의 여인인 것 같다. 대부분의 시가 원초적 생명력으로 약동한다. 한여름의 태양 아래 풍만한 육체의 건강한 나부를 보는 것 같다. 아름다운 어른은 '지지지 온 땅이 으스러지는' 필생의 사랑으로 완성된다고 외친다. 시인에게 시들어가는 나이는 없다. 그런 사랑을 나는 감당할 수 ..

시읽는기쁨 2014.09.15

이상의 연애편지

얼마 전에 이상(李箱)의 연애편지가 발굴되어 공개되었다. 1935년에 쓴 이 편지는 25살 된 이상이 소설가 최정희를 연모해서 보낸 글이다. 최정희는 백석으로부터도 사랑의 고백을 들었다고 하니 당대의 문학마당에서 인기가 있었던 것 같다. 천재시인이라 불리고 난해한 시로 유명한 이상이지만 연애편지는 뭇 연인의 심정과 다르지 않다. 사랑하는 마음과 그 마음을 받아주지 않는 아쉬움이 애틋하게 적혀 있다. 청년 시절 이상의 한 단면을 엿보게 되어 흥미롭다. 뒷날 최정희는 시인 김동환과 결혼하여 세 딸을 두었는데, 그중 소설가 김지원과 김채원은 이상문학상을 받았다고 한다. 세상 인연이라는 게 참 묘하다. 지금 편지를 받았으나 어쩐지 당신이 내게 준 글이라고는 잘 믿어지지 않는 것이 슬픕니다. 당신이 내게 이러한 ..

길위의단상 2014.08.01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딸네 집에 갔다가 책장에 꽂혀 있는 이 책을 펴고는 단숨에 읽었다. 돋보기를 가져가지 않아 침침한 눈이었지만 한 번 빠져드니 헤어나지 못했다. 작가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나를 사로잡았기 때문이다. 는 돈과 외모지상주의에 맹종하는 우리 사회의 비인간적 시스템을 고발한다. 소수의 권력자가 다수를 지배하는 전략이 부와 아름다움에 대한 신화를 부풀리는 것이다. 돈과 예쁜 여자는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강력한 이데올로기가 되었다. 대중은 부나비처럼 부와 아름다움을 향한 경쟁 대열에 뛰어든다. 소수의 노예가 되기를 자청하는 것이다. 가혹한 세상에 들러리를 선 시녀의 처지가 바로 우리의 자화상이다. 소설의 이야기는 못생긴 여자와의 사랑 이야기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단지 못생겼다는 이유로 여자는 놀림을 받고, 소외되..

읽고본느낌 2014.03.25

한 장의 사진(18)

인생에서 그나마 아름다운 시절은 유년이 아닐까 싶다. 유년은 가족의 축복 가운데 태어나서 지극한 사랑과 보살핌을 받으며 자라는 때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노래 가사 그대로의 시기이기도 하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유년의 기억은 대부분 망각의 늪으로 가라앉았다. 간신히 남은 몇 개의 기억이 따스했던 그 시절로 나를 데려가 준다. 삭막한 인생살이에 지친 몸이 쉬어가는 오아시스가 바로 유년의 기억이다. 내 의식에 남아 있는 최초의 기억은 아마 서너 살 무렵의 일이었을 것이다. 따스한 봄날이었는데 시골 동네에는 잔치가 있었던 것 같다. 동네 사람들은 새 옷을 곱게 차려입고 어딘가로 가고 있었다. 나도 고모 등에 업혀서 한 손에는 풍선을 들고 행렬을 따르고 있었다. 골목길은 시끌벅적했다. 그런..

길위의단상 2014.03.10

겨울왕국

애니메이션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영화다. 지난 16일 개봉한 '겨울왕국'은 현재 누적 관객수 700만을 바라보고 있다. 애니메이션으로는 경이적인 기록이다. 사람을 불러모으는 힘이 어디서 나오는지 궁금해서 이 영화를 보았다. '겨울왕국'의 매력은 음악에 있는 것 같다. 가슴을 뭉클하게 하는 장면은 대부분 음악과 연관이 있다. 특히 깊은 산속으로 숨으며 엘사가 부르는 'Let it go'가 백미다. 세상을 버리고 자기의 세계를 찾아 떠나는 소녀의 결기와 자신감이 좋았다. 누구의 인생에서나 과거와 결별해야 하는 순간이 있게 마련이다. Let it go, Let it go / 다 내려놓자, 다 내려놔 That perfect girl is gone / 그 완벽했던 소녀는 이제 없어 Here I stand in t..

읽고본느낌 2014.02.08

겨울 사랑 / 박노해

사랑하는 사람아 우리에게 겨울이 없다면 무엇으로 따뜻한 포옹이 가능하겠느냐 무엇으로 우리 서로 깊어질 수 있겠느냐 이 추운 떨림이 없다면 꽃은 무엇으로 피어나고 무슨 기운으로 향기를 낼 수 있겠느냐 나 언 눈 뜨고 그대를 기다릴 수 있겠느냐 눈보라 치는 겨울밤이 없다면 추워 떠는 자의 시린 마음을 무엇으로 헤아리고 내 언 몸을 녹이는 몇 평의 따뜻한 방을 고마워하고 자기를 벗어버린 희망 하나 커 나올 수 있겠느냐 아아 겨울이 온다 추운 겨울이 온다 떨리는 겨울 사랑이 온다 - 겨울 사랑 / 박노해 며칠 전에 입춘이 지났고, 계절적으로는 겨울의 끝에 이르렀다. 사계절이 순환하듯 인생에도 주기적인 사이클이 있다. 전에 명리학책을 보다가 10년 주기로 대운(大運)이 찾아온다는 내용을 보고 내 지나온 삶에도 적..

시읽는기쁨 2014.02.07

포장마차 국수집 주인의 셈법 / 배한봉

바람 몹시 찬 밤에 포장마차 국수집에 허름한 차림의 남자가 예닐곱쯤 되는 딸의 손을 잡고 들어왔다 늙수그레한 주인이 한 그릇 국수를 내왔는데 넘칠 듯 수북하다 아이가 배불리 먹고 젓가락을 놓자 남자는 허겁지겁 남은 면발과 주인이 덤으로 얹어준 국수까지 국물도 남김없이 시원하게 먹는다 기왕 선심 쓸 일이면 두 그릇을 내놓지 왜 한 그릇이냐 묻자 주인은, 그게 그거라 할 수 있지만 그러면 그 사람이 한 그릇 값 내고 한 그릇은 얻어먹는 것이 되니 그럴 수야 없지 않느냐 한다 집으로 돌아오며 그 포장마차 주인의 셈법이 좋아 나는 한참이나 푸른 달을 보며 웃는다 바람은 몹시 차지만 하나도 춥지 않다 - 포장마차 국수집 주인의 셈법 / 배한봉 인간에 대한 예의를 생각한다. 누군가를 도울 때에도 세심한 배려가 필요..

시읽는기쁨 2014.01.10

절화행(折花行) / 이규보

진주 이슬 머금은 모란꽃을 미인이 꺾어들고 창 앞을 지나며 살짝 웃음띠고 낭군에게 물었다 "꽃이 예뻐요, 제가 예뻐요?" 낭군이 짐짓 장난을 섞어서 말했다 "꽃이 당신보다 더 예쁘구려." 미인은 그 말 듣고 토라져서 꽃을 밟아 뭉개며 말했다 "꽃이 저보다 더 예쁘시거든 오늘밤은 꽃을 안고 주무세요." - 꽃을 꺾어들고 / 이규보 牧丹含露眞珠顆 美人折得窓前過 含笑問檀郞 花强妾貌强 檀郞故相戱 强道花枝好 美人妬花勝 踏破花枝道 花若勝於妾 今宵花同宿 - 折花行 / 李奎報 즐겨보는 프로인 '개콘'에 '두근두근'이라는 코너가 있다. 좋아한다는 걸 대놓고 고백하지 못하는 두 청춘남녀의 수줍고도 풋풋한 사랑을 보노라면 절로 미소가 인다. 은은한 60년대식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이규보의 시 '절화행(折花行)'에서 받는..

시읽는기쁨 2013.11.06

머리맡에 대하여 / 이정록

1 손만 뻗으면 닿을 곳에 머리맡이 있지요 기저귀 놓였던 자리 이웃과 일가의 무릎이 다소곳 모여 축복의 말씀을 내려놓던 자리에서 머리맡은 떠나지 않아요 아무 말도 떠오르지 않던 첫사랑 때나 온갖 문장을 불러들이던 짝사랑 때에도 함께 밤을 새웠지요 새벽녘의 머리맡은 구겨진 편지가 그득했지요 혁명시집과 입영통지서가 놓이고 때로는 어머니가 놓고 간 자리끼가 목마르게 앉아 있던 곳 나에게로 오는 차가운 샘 줄기와 잉크병처럼 엎질러지던 모든 한숨이 머리맡을 에돌아 들고났지요 성년이 된다는 것은 머리맡이 어지러워지는 것 식은땀 흘리는 생의 빈칸마다 머리맡은 차가운 물수건으로 나를 맞이했지요 때론 링거줄이 내려오고 2 지게질을 할 만하자 / 내 머리맡에서 온기를 거둬 가신 차가운 아버지 / 설암에 간경화로 원자력병원..

시읽는기쁨 2013.08.29

나는 누구인가?

영화 '레미제라블'에 나오는 인상적인 대사 중 하나가 장발장의 "나는 누구인가?"(Who am I?)라는 독백이다. 그는 자베르 경감을 피해 신분 세탁을 하고 시장이 되어 살아간다. 그러다가 다른 데서 장발장이 잡혔다는 소식을 듣고 고민하게 된다. 자신이 진짜 장발장이라고 고백하면 다시 감옥에 들어가고 모든 것을 잃는다. 숨기면 시장직을 유지하며 잘 살 수는 있으나 다른 사람이 억울하게 희생된다. 양심의 갈등으로 번민할 때 그가 스스로 묻는 말이 이것이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는 한 인간이 성장하면서 새로운 자아 인식에 눈뜰 때 던지는 질문이다. 사춘기 열병의 원인도 결국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존재론적 질문 때문이다. 평생을 두고 고뇌해야 할 화두를 받는 것이다. 그것은 질문으로 주..

참살이의꿈 2013.04.09

자기라는 말에 종신보험을 들다 / 손택수

자기라는 말, 참 오랜만에 들어본다 딱딱하게 이어지던 대화 끝에 여자후배의 입술 사이로 무심코 튀어나온 자기, 어 여자후배는 잠시 당황하다 들고 온 보험서류를 내밀지 못하고 허둥거린다 한순간 잔뜩 긴장하고 듣던 나를 맥없이 무장해제 시켜버린 자기, 사랑에 빠진 여자는 아무 때고 꽃잎에 이슬 매달리듯 혀끝에 자기라는 말이 촉촉이 매달려 있는가 주책이지 뭐야, 한번은 어머니하고 얘기할 때도 그랬어 꽃집 앞에 내다논 화분을 보고도 자기, 참 예쁘다 중얼거리다가 혼자서 얼마나 무안했게 나는 망설이던 보험을 들기로 한다 그것도 아주 종신보험으로 들기로 한다 자기, 사랑에 빠진 말 속에 - 자기라는 말에 종신보험을 들다 / 손택수 시가 전하는 현장으로 들어가 보면 무척 재미있다. 보험서류를 들고 옛날 여자후배가 찾..

시읽는기쁨 2013.03.24

그래도라는 섬이 있다 / 김승희

가장 낮은 곳에 젖은 낙엽보다 더 낮은 곳에 그래도라는 섬이 있다 그래도 살아가는 사람들 그래도 사랑의 불을 꺼뜨리지 않는 사람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섬, 그래도 어떤 일이 있더라도 목숨을 끊지 말고 살아야 한다고 천사 같은 김종삼, 박재삼, 그런 착한 마음을 버려선 못쓴다고 부도가 나서 길거리로 쫓겨나고 인기 여배우가 골방에서 목을 매고 뇌출혈로 쓰러져 말 한 마디 못 해도 가족을 만나면 반가운 마음, 중환자실 환자 옆에서도 힘을 내어 웃으며 살아가는 가족들의 마음속 그런 사람들이 모여 사는 섬, 그래도 그런 사람들이 모여 사는 섬, 그래도 그 가장 아름다운 것 속에 더 아름다운 피 묻은 이름, 그 가장 서러운 것 속에 더 타오르는 찬란한 꿈 누구나 다 그런 섬에 살면서도 세상의 어느 지도에도 알려..

시읽는기쁨 2013.01.29

화엄 세계 읽다 / 김정원

초가집 그을음 새까만 설거지통 옆에는 항시 큰항아리 하나 놓여 있었다 어머니는 설거지 끝낸 물 죄다 항아리에 쏟아 부었다 하룻밤 잠재운 뒤 맑게 우러난 물은 하수구에 흘려보내고 텁텁하게 가라앉은 음식물 찌꺼기는 돼지에게 주었다 가끔은 닭과 쥐와 도둑고양이가 몰래 훔쳐 먹기도 하였다 하찮은 모음이 거룩한 살림이었다 어머니는 뜨거운 물도 곧장 항아리에 쏟아 부었다 그냥 하수구에 쏟아 붓는 일은 없었다 반드시 하룻밤 열 내린 뒤 다시 만나자는 듯 곱게 온 곳으로 돌려 보냈다 하수구와 도랑에 육안 벗어난 존재들 자기 생명처럼 여긴 배려였으니, 집시랑물 받아 빨래하던 우리 어머니들 마음 經도 典도 들여다본 적 없는 - 화엄 세계 읽다 / 김정원 터의 문제가 아니라 먼저 마음의 문제란 걸 단임골 다녀온 후 새롭게 ..

시읽는기쁨 2012.05.04

미라보 다리 / 기욤 아폴리네르

미라보 다리 아래 세느강은 흐르고 우리의 사랑도 흐른다 마음속 깊이깊이 아로새길까 기쁨 앞엔 언제나 괴로움이 있음을 밤이여 오너라, 종아 울려라 세월은 가고 나만 머문다 손에 손을 잡고 얼굴 마주하며 우리의 팔 밑 다리 아래로 영원의 눈길 지친 물살이 천천히 하염없이 흐른다 밤이여 오너라, 종아 울려라 세월은 가고 나만 머문다 사랑이 흘러 세느 강물처럼 우리네 사랑도 흘러만 간다 어찌 삶이란 이다지도 지루하더냐 희망이란 또 왜 격렬하더냐 밤이여 오너라, 종아 울려라 세월은 가고 나만 머문다 햇빛도 흐르고 달빛도 흐르고 오는 세월도 흘러만 가니 우리의 사랑도 가서는 오지 않고 미라보 다리 아래 세느강만 흐른다 밤이여 오너라, 종아 울려라 세월은 가고 나만 머문다 - 미라보 다리 / 기욤 아폴리네르 추억의 ..

시읽는기쁨 2012.04.03

사랑의 지옥 / 유하

정신없이 호박꽃 속으로 들어간 꿀벌 한 마리 나는 짖궂게 호박꽃을 오므려 입구를 닫아 버린다 꿀의 주막이 금세 환멸의 지옥으로 뒤바뀌었는가 노란 꽃잎의 진동이 그 잉잉거림이 내 손끝을 타고 올라와 가슴을 친다 그대여, 내 사랑이란 그런 것이다 나가지도 더는 들어가지도 못하는 사랑 이 지독한 마음의 잉잉거림 난 지금 그대 황홀한 캄캄한 감옥에 닫혀 운다 - 사랑의 지옥 / 유하 어렸을 때 이런 장난 많이 했다. 그때는 호박꽃 속에 갇힌 꿀벌이 재미있었다. 그게 시인의 눈을 거치니 사랑과 결혼의 비유로 되었다. 정말 그럴듯하다. 사랑과 결혼이 뭘까? 불빛으로돌진하는 부나비처럼 남녀는 자신의 짝을 찾아 헤맨다. 그리고는 짝짓고 가정을 만들어 자식을 낳는다. 왜 꼭 그래야 하지? 지상의 피조물로서 유전자의 명령..

시읽는기쁨 2012.03.19

선운사에서 / 최영미

꽃이 피는 건 힘들어도 지는 건 잠깐이더군 골고루 쳐다볼 틈 없이 님 한 번 생각할 틈 없이 아주 잠깐이더군 그대가 처음 내 속에 피어날 때처럼 잊는 것 또한 그렇게 순간이면 좋겠네 멀리서 웃는 그대여 산 넘어 가는 그대여 꽃이 지는 건 쉬워도 잊는 건 한참이더군 영영 한참이더군 - 선운사에서 / 최영미 시인은 한 사랑을 떠나보내고 선운사를 찾았는지 모른다. 아마 그때가 4월쯤 되었을까, 뚝뚝 떨어진 선운사 동백꽃을 보았을 것이다. 사랑은 아름답게 꽃을 피웠다가어느 날 떠나갔다. 꽃이 피면 지는 게 자연의 섭리이듯 사람의 일도 마찬가지다. 그걸 모를 리 없건만 서운하고 아쉬운 건 어찌할 수 없다. 그대가 어찌 꽃이 지듯 쉽게 잊히겠는가. 이 시를 읽으면 왜 그런지 김소월의 '진달래꽃'이 떠오른다. 소월의..

시읽는기쁨 2012.03.07

장자[192]

노자가 말했다. "너는 눈을 부릅뜨고 거만하니 너는 누구와 더불어 살겠느냐? 위대한 결백은 더러운 듯하고, 성대한 덕은 부족한 듯하다." 양자거는 움칠하며 얼굴빛을 바꾸고 말했다. "삼가 가르침을 받들겠습니다." 예전에는 숙객들이 그를 자기 가문의 대인처럼 맞이했으며 주인은 자리를 펴고, 처는 수건과 빗을 들고 숙객들은 자리를, 불 쬐던 자들은 화로를 양보했으나 이번에 돌아오자 숙객들이 그와 벗하고 자리를 다투었다. 老子曰 而휴휴우우 而誰與居 大白若辱 盛德若不足 陽子居?然變容曰 敬聞命矣 其往也 舍者迎將其家 公孰席 妻孰巾櫛 舍者避席 煬者避조 其反也 舍者與之 爭席矣 - 愚言 2 이 짧은 일화에서 장자의평등사상을 엿볼 수 있다. 양자거는 노자의 가르침을 받고 당장 삶으로 실천한다. 그는 높은 데를 버리고 낮은..

삶의나침반 2012.01.12

사랑 / 고은

사랑이 뭐냐고 문기초등학교 아이가 물었다 얼른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궁한 나머지 지나가는 새 바라보며 얼버무렸다 네가 커서 할일이란다 돌아서서 후회막급 사랑할 때밖에는 삶이 아니란다라고 왜 대답하지 못했던가 그 아이의 어른은 내일이 이미 오늘인 것을 왜 몰랐던가 저녁 한천가 한 사내의 낚시줄에 걸려버린 참붕어의 절망이 내 절망인 것을 왜 몰랐던가 사랑이 뭐냐고 물었을 때 - 사랑 / 고은 '사랑할 때밖에는 삶이 아니란다'라는 사랑이란 무엇일까? 단순히 두 남녀가 서로 좋아하는 게 사랑의 전부는 아닐 것이다. 부모가 자식을 아끼고 보살피는 것도 사랑의 전부는 아닐 것이다. 사랑에는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 이 시를 읽으면서 사랑이란 '공감의 능력'이라고 말하고 싶어졌다. 타자의 고통을 같이 아파하고, 슬픔..

시읽는기쁨 2011.12.02

어느 노생물학자의 주례사 / 이가림

오늘 새로이 인생의 첫걸음을 내딛는 신랑과 신부에게 내가 평생 실험실에서 현미경으로 기생충을 들여다본 학자로서 짧게 한마디 하겠습니다 무엇보다도 말미잘이 소라게에게 기생하듯이 그렇게 상리공생(相利共生)할 것을 당부하고 싶습니다 개미와 진딧물, 콩과 뿌리혹박테리아 그런 사이만큼만 사랑을 해도 아주 성공한 삶이 될 것입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해삼과 숨이고기처럼 한쪽만 도움 받고 이익을 보는 편리공생(片利共生)하지 말고 서로가 서로의 밥이 되는 아름다운 기생충이 되세요 이상 - 어느 老생물학자의 주례사 / 이가림 사랑은 노력과 학습을 통해 얻어지는 기술이라고 에리히 프롬은 말했다. 기술을 익히기 위해서 쉼 없는 훈련과 연습이 필요하듯 사랑도 마찬가지다. 이성에게 끌리는 호기심이나 열정은 사랑이기보다는 연..

시읽는기쁨 2011.09.16

자전거 / 고은

수유리 안병무네 집 마당에서 초례 마치고 한강가에서 하룻밤 자고 안성 대림동산으로 왔다 상화 남편은 얼간이 성화는 철부지 축의금 봉투를 꺼내보았다 이백만원 얼마 상화 상화 남편 둘이 지닌 것 털어 집을 샀으니 화곡동 집 팔리지 않고 억지로 집을 샀으니 이백만원 얼마 이것으로 살아야 했다 마음속 화수분이라 무어나 차고 무어나 넘쳤다 마음 밖 가난이라 전화도 없다 전화 걸려면 십분쯤 가서 고개 너머 관리사무소 전화를 빌려야 한다 민음사에서도 문익환도 전보로 급래급래를 알려왔다 이백만원 얼마는 곧 동났다 안성장에 가 빗자루 사고 삽도 호미도 샀다 개수대 그릇도 샀다 빈털터리인데 창비에서 원고료가 왔다 살았다 살았다 무턱대고 자전거 한 틀을 샀다 자전거에 상화를 태우고 상화 남편은 견마를 잡혔다 삼단 자전거 바..

시읽는기쁨 2011.09.02

달 밝은 밤에 그대는 무슨 생각하나요 / 황진이

蕭寥月夜思何事 寢宵轉輾夢似樣 問君有時錄忘言 此世緣分果信良 悠悠憶君疑未盡 日日念我幾許量 忙中要顧煩惑喜 喧喧如雀情如常 - 蕭寥月夜思何事 / 黃眞伊 달 밝은 밤에 그대는무슨 생각하나요 잠이 들면 그대는 무슨 꿈 꾸나요 붓을 들면 때로는 내 얘기도 쓰나요 이승에서의 우리 인연이 행복한가요 그대 생각 하다보면 모든 게 궁금해요 하루에 내 생각은 얼마만큼하나요 바쁠 때 나를 돌아보라 하면 괴롭나요 반갑나요 참새처럼 떠들어도 여전히 정겨운가요 - 달 밝은 밤에 그대는무슨 생각하나요 / 황진이 황진이가 당대의 뛰어난 사대부들과 교류를 하고 풍류를 즐겼지만 진실로 사랑했던 사람은 소세양(蘇世讓)이었다고 한다. 소세양은 황진이가 절색이라는 풍문을 듣고는 자신은 한 달만 같이 살고미련없이 헤어질 수 있다고 큰소리치며 황진이..

시읽는기쁨 2011.08.03

그가 출장에서 돌아오는 날 / 박숙이

그가 출장에서 돌아오는 날 나는, 화사한 라일락처럼 피어 있을 것이다 그를 위해 싱싱한 웃음 몇 개를 준비해 두는 일 비가 샌 내 몸을 감쪽같이 도배하는 일 안개에서 빠져 나와 샤워하고 아, 분주해라 곰팡이 슨 그리움 한쪽도 시치미 떼며 감춰 두는 일 그가 묻더라도 내 가슴에 키운 돌미나리 몇 뿌리는 비상금처럼 숨겨두자 그가 눈치채기 전까지는 내 몸이 성냥갑이란 걸 감추고 있는 불이란 것도 절대 실토하지 않을 것이다 오랜만에 그가 내 곁에 포근한 산 그림자처럼 쓰러져 누웠을 때 잊었던 봄! 물푸레나무 푸른 잎사귀로 퍼덕퍼덕 되살아날까? 그런데, 그런데 그가 참았던 봄을 한꺼번에 터트려 오면 어떡하지? 난. - 그가 출장에서 돌아오는 날 / 박숙이 후생에 다시 산다면 여자로 태어나고 싶다. 세상을, 사랑을..

시읽는기쁨 2011.06.01

이상하다 / 최종득

외할머니가 고사리와 두릅을 엄마한테 슬며시 건넵니다. "가서 나물 해 먹어라. 조금이라서 미안타." "만날 다리 아프다면서 산에는 뭐하러 가요. 내가 엄마 때문에 못살아요." 늘 주면서도 외할머니는 미안해하고 늘 받으면서도 엄마는 큰소리칩니다. - 이상하다 / 최종득 고등학생일 때였다. 외할머니가 부모님 고생 하시는 걸 꺼내며 나중에 은혜를 갚으라는 말을 자주 하셨다. 어느 때인가는 그게 듣기 싫었던가 보다. 아마 이렇게 쏘아붙였던 것 같다. "세상 부모들 다 그렇게 고생하거든요. 나도 자식한테 똑 같이 할 거구요." 결국 그 말이 부모님 귀에까지 들어갔다. 아무 말씀 안 하셨지만 얼마나 서운하셨을까, 지금 생각해도 얼굴이 화끈거린다. 자식이 부모 마음을 얼마나 헤아릴 수 있을까. 결혼하고 자식 낳으면 ..

시읽는기쁨 2011.04.10

부용 묘 가는 길

초봄의 햇살이 따스한 날, 부용의 묘를 찾아간다. 천안 광덕사(廣德寺)에서 오른쪽 산길로 접어들어 1 km 쯤 올라가면 부용의 묘가 있다. 김부용(金芙蓉)은 황진이, 이매창과 함께 조선 3대 명기(名妓)로 일컬어진다. 김부용(金芙蓉)은 1812년 평안도 성천에서 가난한 선비의 무남독녀로 태어났으나 어린 나이에 부모를 여의고 나서는 퇴기의 수양딸로 들어가 성천 고을의 관기가 된다. 워낙 시문에 뛰어나고 총명해 사또들의 사랑을 독차지한다. 부용의 나이 열아홉일 때 새로 부임한 사또는 자신의 스승인 평양감사 김이양(金履陽)에게 부용을 소개해 준다. 이때 김 대감의 나이는 77세였는데 부용은 노 대감의 신변을 돌봐드리라는 사또의 명령을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인다. “아리따운 젊은 시인이 어찌 나 같은 노객을 상대..

사진속일상 2011.03.24

나는 세상을 너무 사랑할까 두렵다 / 이기철

나팔꽃 새 움이 모자처럼 볼록하게 흙을 들어 올리는 걸 보면 나는 세상이 너무 아름다워질까 두렵다 어미 새가 벌레를 물고 와 새끼 새의 입에 넣어주는 걸 보면 나는 세상이 너무 따뜻해질까 두렵다 몸에 난 상처가 아물면 나는 세상을 너무 사랑할까 두렵다 저 추운 가지에 매달려 겨울 넘긴 까치집을 보면 나는 이 세상을 너무 사랑할까 두렵다 이 도시의 남쪽으로 강물이 흐르고 강둑엔 벼룩나물 새 잎이 돋고 동쪽엔 살구꽃이 피고 서쪽엔 초등학교 새 건물이 들어서고 북쪽엔 공장이 지어지는 것을 보면 나는 이 세상을 너무 사랑할까 두렵다 서문시장 화재에 아직 덜 타고 남은 포목을 안고 나오는 상인의 급한 얼굴을 보면 찔레꽃 같이 얼굴 하얀 이학년이 가방을 메고 교문을 들어가는 걸 보면 눈 오는 날 공원의 벤치에 석상..

시읽는기쁨 2011.03.11

만추

외로운 사람은 외로운 사람끼리 알아보는가, 사랑의 상처에 마음을 닫은 애나는 시애틀로 가는 버스 안에서 훈을 만난다. 훈은 돈을 받고 여자 파트너가 되어 주는 남자다. 애나는 남편을 죽인 죄로 감옥에 갇힌 죄수다. 그녀는 어머니 장례식에 가기 위해 3일간의 휴가를 얻었다. 애나 역은 탕웨이, 훈 역은 현빈이다. 영화 배경은 안개 낀 시애틀이다. 영화는 잔잔하고 애잔하게 흐른다. 둘은 만난지 얼마 되지 않아 사랑에 빠진다. 훈은 처음에 호기심으로 접근했지만 애나의 표정에 끌리고, 무뚝뚝한 애나는 훈에게 마음을 연다. 사람이 사람과 가까우지는 건 많이 알아서가 아니다. 장례식장에서 애나는 가족과도 무덤덤하다. 가족들은 유산으로 서로 싸운다. 애나의 오빠 친구와 훈 사이에 다툼이 생겼을 때 그가 말한다. "니..

읽고본느낌 2011.03.03

화려한 외출

아내와 시내 나들이를 나갔다. 음력 정월 스무 날, 한 가지 일이 마무리되고 조금은 어깨가 가벼워졌다. 참치횟집에서 가장 비싼 정식을 시켰다. 언제 이런 걸 먹어보랴, 큰 맘 먹고 사치를 부렸다. 광화문 씨네큐브에서 이태리 영화 ‘아이 엠 러브’를 보았다. 치명적인 사랑 이야기였다. 재벌 가문의 귀부인인 엠마는 어느 순간 아들의 친구를 사랑하게 되면서 모든 것에 새롭게 눈을 뜬다. “나는 이제 당신이 알던 내가 아니야.” 그녀의 선택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부와 신분, 어머니의 자리를 내던지고 그녀가 얻은 것이 진정 사랑일까? 판단 유보다. 어찌 되었든 주인공으로 나온 틸다 스윈튼의 연기는 뛰어났다. 덕수궁 돌담길과 경복궁 돌담길을 걸었다. 광화문광장을 지났다. 교보빌딩에 걸린 대형 현수막이 봄을 알..

사진속일상 2011.02.22

우리는 사랑일까

알랭 드 보통의 소설 는 남녀 사랑의 탐구생활이다. 사랑하는 두 남녀의 심리를 분석하고 설명하는 것이 의 소설판 같기도 하다. 여자 주인공인 엘리스가 에릭과 만나 사랑하고 이별하는 이야기인데 일반적인 연애소설과 다른 점이라면 사랑의 과정을 심리학적, 철학적 지식을 동원해 분석하고 있다는 것이다. 원제목이 ‘The Romantic Movement’인데 결코 로맨틱하지는 않다. 그래서 어떤 독자에게는 재미없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저 달콤한 연애 이야기만 기대한다면 이 책은 보지 않는 게 나을지 모른다. 눈에 콩깍지가 낀다고 표현하듯 사랑은 환상에서 시작된다. 에릭이 구두끈 매는 모습을 보면서 엘리스는 이렇게 귀엽게 구두끈을 매는 사람을 찾아내다니, 꿈이 아닌가, 하고 황홀해 한다. 그러다가 달콤한 밀월기간..

읽고본느낌 2011.02.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