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136

클라라

클라라(Clara, 1819-1896)와 슈만(Schuman, 1810-1856), 그리고 브람스(Brahams, 1833-1897). 음악에 문외한이다보니 세 사람의 사랑 이야기도 영화를 보고나서야 자세히 알게 되었다. 슈만과 브람스의 클라라에 대한 사랑은 클래식 역사에서도 유명한 러브 스토리라고 한다. 클라라는 당대의 촉망 받던 여류 피아니스트였다. 슈만과 어렵게 결혼해서 가정을 꾸리며 음악 활동을 계속한다. 그녀는 남편 대신 교향악단을 지휘할 정도로 적극적이고 진취적인 여성이었다. 슈만의 제자로 함께 살게 되면서 브람스는 클라라의 매력에 빠져든다. 당시 클라라는 34살, 브람스는 20살이었다. 그리고 브람스에게 클라라는 평생 사모하는 구원의 여성이 된다. 두통과 마약중독에 시달리던 슈만은 정신병원에..

읽고본느낌 2010.12.21

가끔은 세상이 환하다 / 차옥혜

친구 영숙이는 나이 50이 넘어 간호사 자격증을 따고 좋은 수입을 올리던 외과의사 남편과 함께 사택으로 10여 평 아파트와 두 사람 합쳐 월급 100$을 받기로 하고 카자흐스탄 알마타이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여 의료봉사 길을 떠났다 알마타이 대평원엔 긴 겨울 내내 눈이 덮이고 시내엔 오전 내내 자욱한 안개 속에서 나무마다 얼음꽃이 피고 집 없는 사람들이 동상 걸린 발을 질질 끌며 서성거린다고 치료받으러 온 동상 환자의 양말이 발바닥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아 어쩔 수 없이 살과 함께 도려낸다고 환자들 몸에서 이가 뚝뚝 떨어지고 어떤 환자의 몸은 일부가 썩어 구더기가 우글거리고 상처 냄새가 분뇨 냄새보다 심했다고 어떤 환자들은 약을 주면 팔아 빵을 산다고 의료봉사 틈틈이 야채를 길러 팔아 병원 재정에 보태야 ..

시읽는기쁨 2010.09.28

연애와 사랑

사랑의 스펙트럼에도 여러 가지가 있다. 사랑이라는 말 속에는 그만큼 다중적인 의미가 들어있다. 그래서 연애와 사랑은 그 뉘앙스가 다르다. 연애 감정도 사랑의 일부이지만 둘을 구분해서 생각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연애는 남녀 사이에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감정이다. 연애는 일정한 나이가 되면 어느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생물적 현상인 것이다. 종족을 번식시키라는 유전자의 명령이 이성에 대한 연애 감정으로 나타난다. 불현듯 상대가 매력적으로 보이기 시작하면서 연애의 열병은 시작된다. 연애의 특징은 상대에 대한 맹목적인 집착이다. 연애는 그 사람을 내가 독점해야 한다는 욕망이다. 그러므로 연애는 고통을 수반한다. 항상 보지 못한다는 괴로움, 다른 사람에게 앗길 것 같은 두려움과 질투가 혼재하는 것이 연애다. 만약 ..

길위의단상 2010.08.05

가서 당신도 그렇게 행하시오

그 율사가 스스로 의로운 체하려고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하니 예수께서 대꾸하셨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들을 만났는데 그들이 그를 벗기고 때리고 하여 반쯤 죽여 놓고 물러갔습니다. 마침 한 제관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는 피해 갔습니다. 마찬가지로 한 레위 사람도 와서 보고는 피해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한 사마리아 사람이 길을 가다가 와서 보고 불쌍히 여겨 다가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부어 상처를 싸맨 다음 그 사람을 자기 짐승에 태워 객사로 데려다가 돌보아 주었습니다. 이튿날 그는 두 데나리온을 꺼내 객사 주인에게 주면서 ‘저 사람을 돌보아 주시오. 비용이 더 들면 돌아올 때 갚아 드리겠소.’ 하였습니다. 이 세 사람 가운데 누가 강도 맞은 사람의 이웃이 되..

참살이의꿈 2010.07.31

멀리 있어도 사랑이다 / 정윤천

눈앞에 당장 보이지 않아도 사랑이다. 어느 길 내내, 혼자서 부르며 왔던 어떤 노래가 온전히 한 사람의 귓전에 가 닿기만을 바랐다면, 무척은 쓸쓸했을지도 모를 서늘한 열망의 가슴이 바로 사랑이다. 고개를 돌려 눈길이 머물렀던 그 지점이 사랑이다. 빈 바닷가 곁을 지나치다가 난데없이 파도가 일었거든 사랑이다. 높다란 물너울의 중심 속으로 제 눈길의 초점이 맺혔거든, 거기 이 세상을 한꺼번에 달려온 모든 시간의 결정과도 같았을, 그런 일순과의 마주침이라면, 이런 이런, 그렇게는 꼼짝없이 사랑이다. 오래전에 비롯되었을 시작의 도착이 바로 사랑이다. 바람에 머리카락이 헝클어진 손가락 빗질인 양 쓸어 올려보다가, 목을 꺾고 정지한 아득한 바라봄이 사랑이다. 사랑에는 한사코 진한 냄새가 배어 있어서, 구름에라도 실..

시읽는기쁨 2010.05.27

사랑법 첫째 / 고정희

그대 향한 내 기대 높으면 높을수록 그 기대보다 더 큰 돌덩이를 매달아 놓습니다. 부질없는 내 기대 높이가 그대보다 높아서는 아니 되겠기에 내 기대 높이가 자라는 쪽으로 커다란 돌맹이를 매달아 놓습니다. 그대를 기대와 바꾸지 않기 위해서 기대 따라 행여 그대 잃지 않기 위해서 내 외롬 짓무른 밤일수록 제 설움 넘치는 밤일수록 크고 무거운 돌덩이 하나 가슴 한복판에 매달아 놓습니다. - 사랑법 첫째 / 고정희 오늘이 어린이날이다. 마침 어제는 한국방정환재단과 연세대 사회발전연구소가 '2010 한국 어린이와 청소년의 행복지수 국제 비교'를 발표했다. 그에 따르면 현재 우리나라 어린이와 청소년의 행복도는 54% 정도로 OECD 20개 나라 중 꼴찌를 기록했다. 가장 큰 이유가 학업 스트레스와 부모와의 갈등 때..

시읽는기쁨 2010.05.05

너무 그러지 마시어요 / 나태주

너무 그러지 마시어요. 너무 섭섭하게 그러지 마시어요. 하나님, 저에게가 아니에요. 저의 아내 되는 여자에게 그렇게 하지 말아 달라는 말씀이어요. 이 여자는 젊어서부터 병과 함께 약과 함께 산 여자예요. 세상에 대한 꿈도 없고 그 어떤 삶보다도 죄를 안 만든 여자예요. 신발장에 구두도 많지 않은 여자구요. 한 남자 아내로서 그림자로 살았고 두 아이 엄마로서 울면서 기도하는 능력밖엔 없었던 여자이지요. 자기의 이름으로 꽃밭 한 평 채전밭 한 뙈기 가지지 않은 여자예요. 남편 되는 사람이 운전조차 할 줄 모르고 쑥맥이라서 언제나 버스만 타고 다닌 여자예요. 너무 그러지 마시어요. 가난한 자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하나님, 저의 아내 되는 사람에게 너무 섭섭하게 하지 마시어요. - 너무 그러지 마시어요 / 나태주..

시읽는기쁨 2010.04.02

사랑의 광기

민음사에서 나온 을 읽었다. 두 권으로 되어 1천 페이지에 이르는 완역본이다. 예전에 로 나온 것은 분량이 반밖에 안 되는 다이제스트 판이었다. 그때는 성당 종지기와 집시 처녀와의 순수한 사랑 이야기로 받아들였던 것 같은데 지금 다시 읽으니 도리어 정반대다. 중세 시대 인간 군상들의 사랑의 광기를 그린 내용으로 읽힌다. 소설에서 중심인물은 노트르담의 꼽추인 카지모도라기 보다는 라 에스메랄다이다. 이야기는 노트르담 사원에서 열리는 광인 축제일에서 시작된다. 성당의 부주교인 클로드 프롤로의 명령으로 카지모도는 라 에스메랄다를 납치하려 하지만 실패한다. 야경대장 페뷔스의 도움으로 아가씨는 구출되고 그녀는 순간에 페뷔스에게 반한다. 그리고 죽을 때까지 변치 않는 이 외골수 사랑이 갈등과 불행의 씨앗이 된다. 부..

읽고본느낌 2010.01.06

너를 찾는다 / 오세영

바람이라 이름한다. 이미 사라지고 없는 것들, 무엇이라 호명(呼名)해도 다시는 대답하지 않을 것들을 향해 이제 바람이라 불러본다. 바람이여, 내 귀를 멀게 했던 그 가녀린 음성, 격정의 회오리로 몰아쳐와 내 가슴을 울게 했던 그 젖은 목소리는 지금 어디 있는가. 때로는 산들바람에, 때로는 돌개바람에, 아니 때로는 거친 폭풍에 실려 아득히 지평선을 타고 넘던 너의 적막한 뒷모습 그리고 애잔한 범종(梵鐘)소리, 낙엽소리, 내 귀를 난타하던 피아노 건반, 그 광상곡(狂想曲)의 긴 여운, 어느 먼 변경 척박한 들녘에 뿌리내려 민들레, 쑥부쟁이, 개망초 아니면 씀바귀꽃으로 피어났는가. 말해다오. 강물이라 이름한다. 이미 잊혀진 것들, 그래서 무엇이라 아예 호명조차 할 수 없는 것들을 향해 이제 강물이라 불러본다...

시읽는기쁨 2009.11.21

열애 / 이수익

때로 사랑은 흘낏 곁눈질도 하고 싶지. 남몰래 외도(外道)도 즐기고 싶지. 어찌 그리 평생 붙박이 사랑으로 살아갈 수 있나. 마주 서 있음만으로도 그윽이 바라보는 눈길만으로도 저리 마음 들뜨고 온몸 달아올라 절로 열매 맺는 나무여, 나무여, 은행나무여. 가을부터 내년 봄 올 때까지 추운 겨울 내내 서로 눈 감고 돌아서 있을 동안 보고픈 마음일랑 어찌 하느냐고 네 노란 연애편지 같은 잎사귀들만 마구 뿌려대는 아, 지금은 가을이다. 그래, 네 눈물이다. - 열애 / 이수익 암수가 딴그루인 나무들이 많이 있지만 시인들이 유독 은행나무 사랑을 노래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시인뿐만이 아니라 누구나 마찬가지다. 학창 시절에 노란 은행잎을 책갈피에 끼워두었다가 편지를 쓸 때면 함께 보내곤 했던 경험이 누구나 있을 것이다..

시읽는기쁨 2009.10.31

쉬 / 문인수

그의 상가엘 다녀왔습니다. 환갑을 지난 그가 아흔이 넘은 그의 아버지를 안고 오줌을 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생(生)의 여러 요긴한 동작들이 노구를 떠났으므로 , 하지만 정신은 아직 초롱 같았으므로 노인께서 참 난감해 하실까봐 "아버지, 쉬, 쉬이, 어이쿠, 어이쿠, 시원허시것다아" 농하듯 어리광 부리듯 그렇게 오줌을 뉘였다고 합니다. 온몸, 온몸으로 사무쳐 들어가듯 아, 몸 갚아드리듯 그렇게 그가 아버지를 안고 있을 때 노인은 또 얼마나 더 작게, 더 가볍게 몸 움츠리려 애썼을까요. 툭, 툭, 끊기는 오줌발, 그러나 그 길고 긴 뜨신 끈, 아들은 자꾸 안타까이 땅에 붙들어매려 했을 것이고 아버지는 이제 힘겹게 마저 풀고 있었겠지요. 쉬- 쉬! 우주가 참 조용하였겠습니다. - 쉬/ 문인수 외할머니는 온몸..

시읽는기쁨 2009.07.29

생명의 본능

‘21세기에는 남자도 화장을 한다’라는 책은 새로운 여성의 세기가 다가왔음을 알려주고 있다. 그 책 내용 중에 동물세계에서는 암컷의 바람기가 보편적인 현상임을 보여주는 예들이 나온다. 새들 새끼의 유전자를 검사했더니 반 이상이 자신의 짝이 아닌 다른 수컷과의 관계로 태어난 것이 밝혀졌다. 일부일처제를 지킨다고 알려진 원앙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현상은 진화생물학적으로 볼 때 당연한 일이다. 다양하고 질 좋은 유전자를 확보하는 것이 생명의 목적일진대 평생을 한 파트너와 관계한다는 것이 도리어 비정상적으로 보인다. 다양한 유전자를 가진 자식이 훨씬 더 환경 변화에 적응하고 생존할 확률이 높다. 인간세상도 별로 달라 보이지 않는다. 다만 남자의 바람기가 쉽게 드러나는 것에 비해 여자의 바람기는 은폐되어 있고 또..

읽고본느낌 2009.06.29

춤 / 이종암

그녀한테서 문자가 왔다 팔공산 영불암* 오르는 길, 연초록 드레스를 입은 무용수들이 일제히 왈츠를 추고 있어요 어쩌란 말인가 그 왈츠의 상대는 아마도 푸른 바람이겠지 연초록 나뭇잎들이 일제히 바람과 손 맞잡고 왈츠를 춘다고, 하하 그렇게 우리도 손 맞잡고 춤추자는 것인가 부처를 맞이한다는 영불암 가는 길이니 소신공양燒身供養 몸과 마음마저 다 내어주는 사랑을 저도 알고 있는 것이겠지 춤을 추자고 한다 사랑은 끝없이 춤추는 거라고, 그녀가 대낮에 춤추는 문자를 보내왔다 골똘히, 춤 속으로 나는 걸어간다 * 그녀가 말한 팔공산 영불암은 염불암의 오기였다. 그러나 어쩌랴, 처음 그녀가 보내준 문자대로 영불암을 마음에 들고 나는 이미 이렇게 시를 써버린 것을 - 춤 / 이종암 사랑에 대한 남자의 독법을 이 시는 ..

시읽는기쁨 2009.06.19

늙어가는 아내에게 / 황지우

내가 말했잖아. 정말, 정말, 사랑하는, 사랑하는, 사람들. 사랑하는 사람들은, 너, 나 사랑해? 묻질 않어 그냥, 그래, 그냥 살아 그냥 서로를 사는 게야 말하지 않고, 확인하려 하지 않고, 그냥 그대 눈에 낀 눈꼽을 훔치거나 그대 웃깃의 솔밥이 뜯어주고 싶게 유난히 커보이는 게야 생각나? 지금으로부터 14년 전, 늦가을, 낡은 목조 적산 가옥이 많던 동네의 어둑어둑한 기슭, 높은 축대가 있었고, 흐린 가로등이 있었고 그 너머 잎 내리는 잡목 숲이 있었고 그대의 집, 대문 앞에선 이 세상에서 가장 쓸쓸한 바람이 불었고 머리카락보다 더 가벼운 젊음을 만나고 들어가는 그대는 내 어깨 위의 비듬을 털어주었지 그런거야, 서로를 오래오래 그냥, 보게 하는 거 그리고 내가 많이 아프던 날 그대가 와서, 참으로 하..

시읽는기쁨 2009.05.25

당신의 사랑은 안녕하신가요?

세상에서 가장 흔한 거짓말의 순위를 매긴 것을 보았다. 15 위 "이 주사 하나도 안 아파요!" (간호사) 14 위 "전원 취업 보장! 전국 최고의 합격률!" (학원 광고) 13 위 "그냥 친한 선후배 사이예요!" (스캔들 난 연예인) 12 위 "이건 너한테만 말하는 거야!" (친구) 11 위 "지하철에서 걸어서 5분 거리!" (아파트 분양 광고) 10 위 "옷이 너무 잘 어울려요!" (옷가게 점원) 9 위 "딱 한 잔밖에 안 마셨어요!" (음주운전자) 8 위 "내가 너만할 때는 안 그랬다!" (부모님) 7 위 "이 문제 꼭 시험에 나온다!" (선생님) 6 위 "이번이 마지막 구입 기회입니다!" (TV홈쇼핑 광고) 5 위 "내가 빨리 죽어야지!" (어르신) 4 위 "이거 팔아도 남는 거 하나 없어요!" ..

길위의단상 2009.04.27

살그머니 / 강은교

비 한 방울 또르르르 나뭇잎의 푸른 옷 속으로 살그머니 들어가네 나뭇잎의 푸른 웃도리가 살그머니 열리네 나뭇잎의 푸른 브롯치도 살그머니 열리네 나뭇잎의 푸른 스카프도 살그머니 열리네 나뭇잎의 푸른 가슴호주머니도 살그머니 열리네 햇빛 한 자락 소올소올 나뭇잎의 푸른 줄기세포 속으로 살그머니 걸어가네 나뭇잎의 푸른 가슴살을 살그머니 살그머니 쓰다듬네 나뭇잎의 푸른 스카프 폭풍에 펄럭펄럭 휘날리는데 나뭇잎의 푸른 가슴살 살그머니 살그머니 빙하로 걸어가는데 살그머니 살그머니 빙하를 쓰다듬는데 나뭇잎의 푸른 웃도리, 나뭇잎의 푸른 브롯치, 나뭇잎의 푸른 스카프, 나뭇잎의 푸른 가슴호주머니, 나뭇잎의 푸른 피톨들을 살그머니 살그머니 살그머니 감싸안는데 살그머니 너의 속살을 벗기고 가슴호주머니를 만지니, 살그머니 열..

시읽는기쁨 2009.04.21

약탕관에 흐르는 눈물 / 고정희

섬이라면 주야로 배 저어가고 산이라면 봉이마다 오르는 길 있으련만 사랑의 길눈 어두운 나는 그대에게 가는 길 아직 찾지 못하였습니다. 천하 명금 이마지가 거문고를 타고 허오가 자지러지게 피리를 분들 노심초사 그대 생각뿐인 내 마음 즐겁지 않으니 영명한 한의사는 내게 사랑의 묘약 한 재 지어주며 사랑의 길눈 밝아지랍니다. 지은 정성 달이는 정성 마시는 정성으루다 사랑의 길눈 밝아져서 그대 나라에 잘 들어가랍니다. 용한 한의사의 처방대로 햇빛 쨍쨍하고 산들바람 부는 날 받아 사랑의 묘약 달이기를 합니다. 진흙으로 빚은 약탕관에 천년설봉 얼음 녹여 사랑의 묘약 털어넣은 후 하루 스물네 시간에 돋은 그리움 썰어넣고 스무 날 우거진 오매불망 구엽초도 비벼넣고 석 달 열흘 무성한 그리움 잘라넣고 삼 년 묵은 섭섭함..

시읽는기쁨 2009.03.31

부부 / 문정희

부부란 무더운 여름밤 멀찍이 잠을 청하다가 어둠 속에서 앵하고 모기 소리가 들리면 순식간에 둘이 합세하여 모기를 잡는 사이이다 너무 많이 짜진 연고를 나누어 바르는 사이이다 남편이 턱에 바르고 남은 밥풀꽃 만한 연고를 손끝에 들고 어디 나머지를 바를 만한 곳이 없나 하고 찾고 있을 때 아내가 주저 없이 치마를 걷고 배꼽 부근을 내어미는 사이이다 그 자리를 문지르며 이 달에 너무 많이 사용한 신용카드와 전기세를 문득 떠올리는 사이이다 결혼은 사랑을 무효화시키는 긴 과정이지만 결혼한 사랑은 사랑이 아니지만 부부란 어떤 이름으로도 잴 수 없는 백 년이 지나도 남는 암각화처럼 그것이 풍화하는 긴 과정과 그 곁에 가뭇없이 피고 지는 풀꽃 더미를 풍경으로 거느린다 나에게 남은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다가 네가 쥐고 ..

시읽는기쁨 2009.02.23

작은 짐승 / 신석정

난(蘭)이와 나는 산에서 바다를 바라다보는 것이 좋았다 밤나무 소나무 참나무 느티나무 다문다문 선 사이사이로 바다는 하늘보다 푸르렀다 난이와 나는 작은 짐승처럼 앉아서 바다를 바라다보는 것이 좋았다 짐승같이 말없이 앉아서 바다같이 말없이 앉아서 바다를 바라다보는 것은 기쁜 일이었다 난이와 내가 푸른 바다를 향하고 구름이 자꾸만 놓아 가는 붉은 산호와 흰 대리석 층층계를 거닐며 물오리처럼 떠다니는 청자기빛 섬을 어루만질 때 떨리는 심장같이 자지러지게 흩날리는 느티나무 잎새가 난이의 머리칼에 매달리는 것을 나는 보았다 난이와 나는 역시 느티나무 아래에 말없이 앉아서 바다를 바라다보는 순하디 순한 작은 짐승이었다 - 작은 짐승 / 신석정 시대가 암담하면 서정적 세계에 대한 그리움은 커져가는가 보다. 이 시는 ..

시읽는기쁨 2008.12.23

널 만나 나를 사랑하게 되었어

"널 만나 나를 사랑하게 되었어!" - 영화 '누들' 포스터에 적혀 있는 말이다. 영화에 나오는 대사인지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주인공 미리의 마음을 이만큼 잘 나타낸 말도 없을 것 같다. 전쟁으로 남편을 두 번이나 잃은 미리에게중국인 아이가 맡겨진다. 그러나 아이 엄마는 불법체류자 단속에 걸려중국으로 강제추방되었다. 말도 통하지 않는 아이와 동거하게 되며 미리는 아이와 인간적 교감을 나눈다. 거기에는 둘 다 상처를 입은 사람들이라는 공감대가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미리는 나이와 언어를 뛰어넘는 따스한 인간애를 보여주고,누들 또한 자신에게 사랑과 배려를 아끼지 않는 미리를 믿고 따른다. 너무나 거칠어진 세상이어선지 이 영화에서 볼 수 있는 약자에 대한연민과 보살핌이 더욱 가슴 따스하게 다가온다. 미리와..

읽고본느낌 2008.09.08

참 좋은 당신 / 김용택

어느 봄날 당신의 사랑으로 응달지던 내 뒤란에 햇빛이 들이치는 기쁨을 나는 보았습니다 어둠 속에서 사랑의 불가로 나를 가만히 불러내신 당신은 어둠을 건너온 자만이 만들 수 있는 밝고 환한 빛으로 내 앞에 서서 들꽃처럼 깨끗하게 웃었지요 아 생각만 해도 참 좋은 당신 - 참 좋은 당신 / 김용택 오늘은 좋은 당신에게 이 시를 보냅니다. 어느 날 고운 미소로 다가온 당신은 이제 내 마음 속에 꽃으로 피었습니다. 당신이 가까이 있거나 멀리 있거나 당신의 향기는 내 주위를 감싸돌며 늘 나를 취하게 합니다. 당신은 그렇게 내 속에 살아 있습니다. 아, 당신은 생각만 해도 참 좋은 사람입니다.

시읽는기쁨 2008.07.08

내 몸속에 잠든 이 누구신가 / 김선우

그대가 밀어올린 꽃줄기 끝에서 그대가 피는 것인데 왜 내가 이다지도 떨리는지 그대가 피어 그대 몸속으로 꽃벌 한 마리 날아든 것인데 왜 내가 이다지도 아득한지 왜 내 몸이 이리도 뜨거운지 그대가 꽃피는 것이 처음부터 내 일이었다는 듯이 - 내 몸속에 잠든 이 누구신가 / 김선우 그대가 내 안으로 들어와서 꽃을 피웁니다. 그대가 떨리고 뜨거운 만큼, 나 역시 떨리고 뜨겁습니다. 그대는 내 안에서 꽃만 피우는 것이 아닙니다. 저 하늘의 별을 내 안에서 반짝이게 하고, 서쪽에서 바람을 불러오고, 찰랑거리며 강물을 흐르게 합니다. 그대는 고운 빛과 맑은 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주의 모든 존재가 그대를 따라 내 안에 들어옵니다. 아, 그러고 보니우리 모두는 한 몸입니다. 그대가 꽃 피는 것이 곧 내 일에 다름..

시읽는기쁨 2008.06.17

사랑의 호르몬

생화학적으로는 인간의 복잡한 감정도 여러 종류의 신경전달물질과 호르몬의 작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사랑도 마찬가지다. 사랑이 싹트고, 사랑에 도취되고, 그리고 종국에는 시들해져 가는 과정도 두뇌 안에서 일어나는 화학적 작용으로 설명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물질적인 설명은아무리 완벽하게되어도 반쪽의 역할밖에 하지 못한다. 꽃을 과학적으로 이해하는 것과 인간의 심미적 감동과는 별개의 문제다. 과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여러 종류의 호르몬들이 사랑의 감정에 관계된다고 한다. 비록 제한적이긴 하지만 인간 본성을 이해하는데는 물질적 측면 역시 무시할 수가 없다. 인간의 사랑에 관계된다는화학물질들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1. 테스토스테론 : 남성다운 체격이나 근육, 활력이나 자신감, 공격성 등을 ..

길위의단상 2008.06.16

이 세상의 애인은 모두가 옛애인이지요 / 박정대

이 세상의 애인은 모두가 옛애인이지요 나의 가슴에 성호를 긋던 바람도 스치고 지나가면 그뿐 하늘의 구름을 나의 애인이라 부를 순 없어요 맥주를 마시며 고백한 사랑은 텅 빈 맥주잔 속에 갇혀 뒹굴고 깃발 속에 써놓은 사랑은 펄럭이는 깃발 속에서만 유효할 뿐이지요 이 세상의 애인은 모두가 옛애인이지요 복잡한 거리가 행인을 비우듯 그대는 내 가슴의 한복판을 스치고 지나간 무례한 길손이었을 뿐 기억의 통로에 버려진 이름들을 사랑이라고 부를 수는 없어요 이 세상의 애인은 모두가 옛애인이지요 맥주를 마시고 잔디밭을 더럽히며 빨리 혹은 좀더 늦게 떠나갈 뿐이지요 이 세상에 영원한 애인이란 없어요 이 세상의 애인은 모두가 옛애인이지요 - 이 세상의 애인은 모두가 옛애인이지요 / 박정대 검은 머리 파뿌리 되도록 사랑하자..

시읽는기쁨 2008.04.25

삶을 이길 수는 없죠

'44 년이라는 긴 시간을 함께 한 부부 그랜트(고든 빈센트)와 피오나(줄리 크리스티)에게 뜻하지 않은 불행이 찾아온다. 아내 피오나가 알츠하이머 병에 걸린 것. 피오나는 자진해서 요양원에 입원하고, 그랜트는 어쩔 수 없이 그녀의 결정을 받아들인다. 그러나 기억을 잃은 피오나가 요양원에서다른 남자와 사랑에 빠지게 되고 그랜트는 피오나에게서 잊혀진다. 그는 둘을 바라보며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자신에 절망한다. 아무리 애써도 아내의 기억을 되살릴 수 없음을 알게된 그랜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마지막 일이 아내를 보내주는 것임을 깨닫게 되는데....' 미로스페이스에서 영화 'Away from Her'를 보았다. 70대의 노부부 사랑 이야기지만 영화를 보고난 느낌은 그리 간단하지 않았다. 이 영화는 산다는 것..

읽고본느낌 2008.04.02

토막말 / 정양

가을 바닷가에 누가 써 놓고 간 말 썰물진 모래밭에 한 줄로 쓴 말 글자가 모두 대문짝만해서 하늘에서 읽기가 더 수월할 것 같다 정순아보고자파서죽껏다씨펄 씨펄 근처에 도장 찍힌 발자국이 어지럽다 하늘더러 읽어 달라고 이렇게 크게 썼는가 무슨 막말이 이렇게 대책도 없이 아름다운가 손등에 얼음 조각을 녹이며 견디던 시리디 시린 통증이 문득 몸에 감긴다 둘러보아도 아무도 없는 가을 바다 저만치서 무식한 밀물이 번득이며 온다 바다는 춥고 토막말이 몸에 저리다 얼음 조각처럼 사라질 토막말을 저녁놀이 진저리치며 새겨 읽는다 - 토막말 / 정양 바닷가의 저 막말 앞에서는 나 역시 가슴 저리며 서 있을 것 같다. 사람이 사람을 만나서 좋아하게 되는 불가해한 인연에 대하여, 죽도록 보고 싶어지는 갈망의 자력에 대하여 나..

시읽는기쁨 2008.03.23

토란잎에 궁그는 물방울 같이는 / 복효근

그걸 내 마음이라 부르면 안되나 토란잎이 간지럽다고 흔들어대면 궁글궁글 투명한 리듬을 빚어내는 물방울의 그 둥근 표정 토란잎이 잠자면 그 배꼽 위에 하늘 빛깔로 함께 자고선 토란잎이 물방울을 털어내기도 전에 먼저 알고 흔적 없어지는 그 자취를 그 마음을 사랑이라 부르면 안되나 - 토란잎에 궁그는 물방울 같이는 / 복효근 맑고 아름답다. 착하고 고운 사람이라면 이런 사랑 할 수 있을까? 인간의 사랑이 이같을 수 있을까? 그러나 우리는 자취 없이, 집착 없이 사랑할 수 없기 때문에 이런 사랑이 그리워 노래하는지도 모른다. 그대가 보고 싶어 하얗게 밤을 새워야 하고, 그대 이름을 부르며 바닷가를 걸어야 한다. 그래서 당신이 털어내기도 전에 미련 없이 떠날 수 없다. 그것을 사랑이라 부를 수 없다고 믿는다. 그..

시읽는기쁨 2008.03.17

소화의 사랑

동료들과 남도여행을 갔을 때 소설 의 무대인 벌교를 찾았다. 소설의 배경이 된 여러 장소들 중에 현부자네 집이 있었다. 벌교읍내와 중도벌판을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양지 바른 곳에 개인집으로서는 으리으리한 기와집을 재현해 놓았는데, 그 옆에 모두가 화장실로 착각한 초라한 집 한 채가 있었다. 나중에 그것이 소화의 집인 줄 알고는 모두가 실소를 했다. 을 읽은 동료들이 하나같이 소화와 정하섭의 사랑 이야기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데 나는 소화라는 이름난 기억날 뿐그들의 사랑에 대해서는 떠오르는 게 없어 답답하기만 했다. 그래서 집으로 돌아와 다시 을 꺼내 들었다. 동료들이 이념 대결보다는 사랑 이야기에 관심을 더 가졌 듯이 나 역시 이번에는 소화와 정하섭의 사랑, 그리고 쫄깃쫄깃한 겨울꼬막 맛이라는 외..

읽고본느낌 2008.03.01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이해와 오해 '이해'란 가장 잘한 오해이고, '오해'란 가장 적나라한 이해다. "너는 나를 이해하는구나"라는 말은 내가 원하는 내 모습으로 나를 잘 오해해준다는 뜻이며, "너는 나를 오해하는구나"라는 말은 내가 보여주지 않고자 했던 내 속을 어떻게 그렇게 꿰뚫어 보았느냐 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사랑과 신앙 인류가 만들어낸 가장 큰 두 거짓말. 사랑이라는 단어와 신앙이라는 단어는 묵음으로 발음되어야 옳다. 허사(虛辭)로 통용되어야 맞다. 기의를 완전하고도 정밀하게 소외시키고 있는 이 기표들.시니피앙과 시니피에의 전혀 연관 없음. 사랑이라는 해묵은 단어는, 일찍이 그리스도 이후, 이천 년 전에 유명무실해졌다. 신앙이라는 오래도록 포르말린에 절여놓은 단어 역시 마찬가지다. 바람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폭풍 ..

읽고본느낌 2008.02.14

사랑하지 않는 자는 모두 유죄다 / 노희경

나는 한때 나 자신에 대한 지독한 보호본능에 시달렸다 사랑을 할 땐 더더욱이 그랬다 사랑을 하면서도 나 자신이 빠져나갈 틈을 여지없이 만들었던 것이다 가령 죽도록 사랑한다거나 영원히 사랑한다거나 미치도록 그립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내게 사랑은 쉽게 변질되는 방부제를 넣지 않은 빵과 같고 계절처럼 반드시 퇴색하며 늙은 노인의 하루처럼 지루했다 책임질 수 없는 말은 하지 말자 내가 한 말에 대한 책임 때문에 올가미를 쓸 수도 있다 가볍게 하자 가볍게 보고는 싶지라고 말하고 지금은 사랑해라고 말하고 변할 수도 있다고 끊임없이 상대와 내게 주입시키자 그래서 헤어질 땐 울고불고 말고 깔끔하게, 안녕 나는 그게 옳은 줄 알았다 그것이 상처받지 않고 상처주지 않는 일이라고 진정 믿었다 그런데, 어느 날 문득 드는 생..

시읽는기쁨 2008.01.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