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살이의꿈

가서 당신도 그렇게 행하시오

샌. 2010. 7. 31. 09:01

그 율사가 스스로 의로운 체하려고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하니 예수께서 대꾸하셨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들을 만났는데 그들이 그를 벗기고 때리고 하여 반쯤 죽여 놓고 물러갔습니다. 마침 한 제관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는 피해 갔습니다. 마찬가지로 한 레위 사람도 와서 보고는 피해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한 사마리아 사람이 길을 가다가 와서 보고 불쌍히 여겨 다가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부어 상처를 싸맨 다음 그 사람을 자기 짐승에 태워 객사로 데려다가 돌보아 주었습니다. 이튿날 그는 두 데나리온을 꺼내 객사 주인에게 주면서 ‘저 사람을 돌보아 주시오. 비용이 더 들면 돌아올 때 갚아 드리겠소.’ 하였습니다. 이 세 사람 가운데 누가 강도 맞은 사람의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합니까?” 율사가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하자, 예수께서 이르셨다. “가서 당신도 그렇게 행하시오.”


위의 글은 루가복음 10장에 나오는 말씀이다. 이 시대에 ‘믿는다는 것’에 환멸을 느끼다가도 이런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 정신이 번쩍 든다. 그리고 예수님을 나의 스승으로 모시고 존경하며 따르고 싶어진다. 어느 날 한 율사가 예수를 찾아와 물었다. “선생님, 제가 어떻게 해야 영원한 생명을 물려받을 수 있겠습니까?” 예수께서는 율법에 적혀 있는 말을 인용해서 대답했다. “온 마음으로, 온 영혼으로, 온 힘으로, 온 정신으로 네 하느님이신 주님을 사랑하시오. 그리고 네 이웃을 네 자신처럼 사랑하시오. 그러면 살게 될 것입니다.” 이에 율사는 누가 자신의 이웃인지를 물었고 이에 예수님은 위와 같은 예화를 통해 약자의 이웃이 되어주라고 하신다. 그렇게 행하는 것이 구원에 이르는 길이라는 것이다.


당시에 사마리아인들이 유대인들로부터 어떤 대우를 받았는지를 생각하면 이 예화는 대단히 파격적이다. 사마리아인들은 유대인들이 바빌론에 포로로 잡혀간 뒤 들어온 이민족이었다.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과 접촉하는 것조차 부정한 일이라며 꺼렸다. 그런데 강도를 만난 사람을 구해준 사람은 제관도 레위인도 아닌 불가촉천민이었던 사마리아인이었다. 여기서 제관이나 레인인은 유대인 중에서도 하느님을 섬기도록 성별된 특별한 사람들이다. 기성 체제의 세력들에게 이런 비유는 무척 불편했을 것이다. 이 예화에서도 전통적 가치관을 전복시키는 예수의 태도를 읽을 수 있다.


이 말씀에서 가장 중요한 대목은 마지막의 “가서 당신도 그렇게 행하시오.”라는 예수의 명령이다. 이유도 없이 강도를 당한 사람이 있거든 무조건 도와주어라는 이 말씀은 그리스도교의 핵심을 나타내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여기서 사마리아인은 고통 받는 약한 존재들에 대한 하느님의 연민을 나타내고 있다. 그것이 바로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이 보여주신 하느님이시다. 하느님은 억눌리고 고통 받는 창조물들에 귀를 기울이시고 그 울부짖음을 듣고 달려오시는 분이시다. 그래서 내가 이해하는 그리스도교는 세상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느끼는 종교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그런 하느님의 사업에 동참한다는 뜻이다.


강도를 당했다는 것은 불가항력적인 폭력에 맞닥뜨린 것이다. 그것은 국가나 제도, 또는 이념의 폭력도 포함된다. 또 강도를 당한 사람을 꼭 한 개인으로만 볼 이유도 없다. 그것은 한 사회가 될 수도 있고 약소국가가 될 수도 있다. 번영하는 세계의 이면에 존재하는 빈민들이 강도를 당해 생사지경에 빠진 사람이기도 하다. 그들의 고통을 외면하고 나의 안락만을 위해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이 바로 성경에 나오는 제관이나 레위인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그러므로 예수를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이라면 “가서 당신도 그렇게 행하시오.” 라는 예수의 말씀에 대해 깊이 묵상하며 자신을 돌아봐야 하리라고 본다. 우리가 깨어있지 못하다면 강도를 당한 이웃이 누구인지 아예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세상의 부조리와 그로 인한 고통에 무지하다는 것은 보고도 외면하는 것과 큰 차이가 없다.


강도를 당해 초주검이 된 이웃은 꼭 사람만이 아니라 다른 생명들이나 자연일 수도 있다. 인간의 탐욕과 이기심으로 삶터를 뺏기고 죽임을 당하는 생명들 역시 우리의 이웃이다. 파헤쳐지고 시멘트로 덮여 제대로 흐르지 못하게 되는 강 역시 우리의 이웃이다. 그들이 사람의 소리를 내지 못한다고 죽어가는 비명을 듣지 못하고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면 우리는 더 이상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없다. 아무리 ‘주님’을 외치고 축복을 달라고 기도한들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돈과 성공의 미망에 사로잡힌 채 이웃의 고통을 외면하고 죽음의 길에 동참한다면 비록 거룩한 제관의 옷은 입었지만 속은 강도의 무리와 마찬가지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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