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전에 보았던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에는 키팅 선생이 수업 시간에 아이들을 학교 기념관으로 데리고 가는 장면이 나온다. 그리고 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는 선배들의 학창 시절 사진을 보여준다. 거기에는 이미 고인이 된 사람들의 젊었을 때 모습이 담겨있다. 내 기억이 맞다면 숙연해진 아이들 뒤에서 키팅 선생은 이렇게 속삭인다. “카르페 디엠!” 키팅 선생이 아이들에게 가르치려는 것이 이 한 마디에 함축되어 있다.
아이들은 미래의 나은 삶을 위해 지금 하고 싶은 것을 포기하고 공부에만 몰두한다. 아이들만 아니라 어른들도 마찬가지다. 내일의 행복을 위해 오늘 누려야 할 즐거움은 포기하고 일에 매달린다. 그런데 학교에서 가르치는 공부란 무엇인가? 체제에 잘 적응시키기 위한 훈련이고 세뇌다. 어느 사회에서나 규율과 전통에 복종하고 말 잘 듣는 학생을 원한다. 그것은 당시의 미국이나 지금의 한국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나 키팅 선생은 달랐다. 키팅 선생은 문학 시간에 아이들로 하여금 교과서를 찢어버리게 한다. 세상의 규격화된 잣대로 시인들을 평가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시를 감상하고 느끼는 데 정답은 없다. 키팅 선생은 아이들을 기존의 틀에서 해방시켜 자유롭게 사고하는 방법을 찾게 한다.
‘카르페 디엠(Carpe Diem)’은 ‘삶을 즐겨라.’ ‘현재에 충실하라.’ 라는 의미의 라틴어다. 그러나 키팅 선생이 말하는 ‘카르페 디엠’은 단순히 현재를 즐기자고 하는 쾌락주의자의 구호가 아니다. ‘카르페 디엠’에는 중요한 전제조건이 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분별하는 능력이 있어야 진정한 ‘카르페 디엠’이 가능하다. 이는 맹자가 말한 시비지심(是非之心)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시(是)와 비(非)를 올바로 구분하는 바른 현실 인식이 없다면 ‘카르페 디엠’은 불가능하다. 자신이 놀고 있는 곳이 돼지우리인 줄도 모르고 희희낙락한다면 그것을 행복이라고 할 수는 없다. 더구나 바른 지성인의 태도는 아니다.
키팅 선생이 아이들에게 가르치려 한 것은 전통이나 관습에 도전하는 의기였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카르페 디엠’이라는 말에 녹아있다. 키팅 선생이 외치는 ‘카르페 디엠’은 단순히 현실에 만족하며 즐겁게 살라는 뜻이 아니다. 도리어 그와 반대로 시대와 사회가 요구하는 것을 거부하면서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인간으로 당당히 서라는 것이다. 체제에 순응하는 침묵의 대열에서 뛰쳐나오라는 요구다. 죽은 시인의 사회는 타인과 세상의 욕망을 나의 욕망으로 대치시키고 의심 없이 받아들인다. 그 껍데기 삶을 깨트리는 것이 ‘카르페 디엠’이다.
오늘 나에게 ‘카르페 디엠’이 주는 의미도 마찬가지라고 생각된다. 너의 길을 당당하게 가라. 모두가 내려오는 계단을 홀로 올라가더라도 주눅 들지 말라. 미래의 불안에 허덕이지 말고 오늘을 즐겨라. 존재의 기쁨을 누려라. “카르페 디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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