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내 마음속을 외경으로 가득 채우는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내 머리 위에서 별이 빛나는 하늘이고, 다른 하나는 내 마음속의 도덕법칙이다.’
20대 때 가장 좋아했던 말이다. 인생의 의미에 대해 고군분투 싸우던 시절이었다.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을 옆구리에 끼고 다니며 심각한 척 폼을 잡기도 했다. 그리고 무슨 뜻인지도 모르는 채로 그 책을 독파했다. 당시에는 세상의 유명한 철학책을 모두 읽어야 한다는 의무감 같은 게 있었고, 그것은 내 자존심이기도 했다. 그리고 나중에 <실천이성비판>을 읽었을 때 - 이 책은 부피도 얇고 읽기도 쉬웠다 - 뒷부분에서 이 구절을 발견하고는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내 머리 위에서 별이 빛나는 하늘과 내 마음속의 도덕법칙, 이 두 가지가 결국 내가 찾는 진리와 나라는 존재의 모든 것이었다.
그때로부터 30년이 넘는 세월이 지났지만 이 말은 아직도 나를 흔들고 있다. 이 말을 조용히 되뇌어보면 별이 빛나는 하늘과 함께 칸트가 마음속의 도덕법칙이라 명명한 것의 신비에 압도당한다. 밖과 안, 알지 못하는 심연과 그 심연 속의 질서가 나를 외경으로 휩싸이게 하는 것이다. 이 말은 나를 그런 신비와 경탄의 세계로 인도하는 주문과 같다. 인간은 저 광대무변한 우주에 비하면 티끌에 불과한 존재지만 내면은 신의 빛으로 가득하다. 또한 밖과 안은 서로 분리된 게 아니다. 내 속을 성찰하면 할수록 반짝이는 별을 볼 수 있을 것이라 믿었고, 그런 믿음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어제 저녁에는 대학 동기들을 만났다. 새로 회사에 취직한 친구를 축하하기 위한 모임이었다. 전에 회사에 다녔던 친구들은 대부분 다 퇴직했는데 몇 년간 놀더니 그중 일부는 다시 일자리를 얻고 있다. 사람에게 일이란 게 수입 이상의 의미가 있음을 친구들이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지금 나는 보장된 자리를 벗어나려 하고 있으니 그들이 의아하게 여기는 건 어쩌면 당연한지 모른다. 대학 동기들이지만 그들과는 생각 차이가 많이 난다. 정치적이거나 현실적인 견해에서부터 이상적인 삶에까지 가치관이 많이 다르다. 그래서 솔직히 많이 외롭다. 그렇게 된 데는 대범치 못하고 옹졸한 내 성격 탓도 크다.
난 대학 때부터 그랬다. 사람들과 어울리기보다는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 살았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스스로를 평가하건데 나는 몽상가며 이상주의자에 가깝다. 친구들과 어울리는데 한계를 느끼지만 한편으로는 그들의 생각과 행동이 유치하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내가 살 수 있는 오기며 방어기재인지 모른다. 또 건방진 생각인지 모르지만 많은 사람들은 젊었을 때의 틀에서 거의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정신적 성장을 멈춘 사람들 같다. 그러나 실제 세상살이에서는 그들이 월등 뛰어나다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세상의 즐거움을 누리는 데도 그들이 몇 수 위다.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일까? 어느 시인은 작고 하찮은 것들에게 다가가 그 존재의 가치를 발견하고 행복해 하는 그 순간이 꽃시절이라고 했다. 난 어디쯤 와 있는 걸까? 제대로 길을 가고 있는 걸까? 그러나 우리 모두의 삶이 부질없기는 마찬가지가 아니겠는가. 일이 있든 없든, 웃는 사람이든 우는 사람이든, 힘들지 않은 인생이 어디 있겠는가. 누구나 자신의 수레가 제일 무겁다고 느낀다. 그래서 우리는 더욱 애틋이 보듬으며 함께 가야 할 존재들이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내 마음속을 외경으로 가득 채우는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내 머리 위에서 별이 빛나는 하늘이고, 다른 하나는 내 마음속의 도덕법칙이다.’ 활발한 친구들의 대화를 들으며 문득 칸트의 이 말이 다시 떠올랐다. 젊었을 때 내 가슴을 뛰게 했던 이 말이 지금도 나를 설레게 한다. 그러고 보니 정작 변하지 않은 것은 나란 말인가. 아직도 꽃과 시에 가슴 두근거리며 철부지 같이 세상을 살아가는 못난이란 말인가. 잠실의 노천카페에서 바라본 서울의 밤하늘은 반짝이는 별 하나 눈에 띄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