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살이의꿈

무위의 재능

샌. 2010. 8. 9. 10:21

장영희 교수가 쓴 책을 읽다가 ‘무위의 재능’이란 제목의 글을 만났다. 자신이 이렇다 할 뛰어난 능력이나 재능이 없지만 ‘무위의 재능’ 즉, 아무 것도 하지 않을 수 있는 능력만은 넘치게 가지고 있다는 내용의 재미있는 글이었다. 아마 장 교수의 신체적 조건이 어릴 때부터 혼자 있으면서 혼자 즐기는 능력을 키우지 않았을까 추측을 해 본다.


일이 없으면 굉장히 불안해하고 초조해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렇게 텅 빈 시간을 견디지 못하는 것은 너무나 일에 매달려서 살아온 관성 때문이 아닌가 싶다. 경제적이고 생산적인 일을 하는데 시간을 보내지 못하면 무능하거나 쓸모없는 인간으로 취급한다. 심지어는 옆의 사람이 일 없이 빈둥거리는 것을 곱게 보아주지도 않는다. 남자가 은퇴 후에 부부간에 갈등이 생기는 것은 근본적으로 이런 ‘무위의 재능’ 부족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한국의 남자들은 일하느라 바쁘게 살아왔다. 일생의 대부분을 새벽에 집을 나가 밤늦게 들어오다 보니 부부가 공유하는 시간은 거의 없었다. 그러다 보니 일 없이 한가한 시간을 부부가 함께 보내는 능력이 퇴화한 것이다.


물론 하루하루 생계를 이어가야 하는 사람에게 일은 필수불가결한 것이고 그런 사람들에게 일 없음의 즐거움을 논하는 것은 사치스런 일일 것이다. 내가 말하는 것은 경제적으로 어느 정도 여유가 있는 부류의 사람들이다. 구태여 일이 없어도 충분히 먹고 살만한 사람들이 끊임없이 일을 찾아서 허우적대는 모습은 마치 일에 포로가 된 사람들 같아 보인다. 물론 일을 통해 자기 성취나 발전을 할 수도 있다. 일의 그런 긍정적 작용까지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하는 일이 무엇이든 거기에 매달림으로써 자신의 존재 의의를 찾는 것은 자신의 인생을 정면으로 대면하기를 회피하는 비겁한 짓 같아 보인다.


휴가를 받아도 며칠만 할 일 없이 지내면 몸이 근질근질해진다는 사람들이 많다. 하다못해 아파트 계단이라도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며 운동을 해야 한다. 없는 일이라도 만들어 내어서 뭔가를 해야 한다. 그러나 나는 다르다. ‘무위의 재능’이 혼자서도 잘 놀 수 있는 능력을 나타내는 것이라면 나 역시 장 교수와 마찬가지로 그런 재능을 타고난 것 같다. 그러나 우리 부모님은 부지런함에 있어서 어느 누구에게도 빠지지 않으신다. 억척스러울 정도로 일을 찾아 하시고 가만히 계시지를 못한다. 그건 우리 형제들도 대부분 마찬가지다. 그러나 ‘무위의 재능’이라고 하지만 실생활에서는 별로 환영받지 못한다. 재능이라고 좋은 명칭을 붙였지만 대체로 게으르고 내성적인 사람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은퇴 후에 일 년 동안은 자유롭게 돌아다니느라 바쁘다고 한다. 마치 직장에 다니듯, 부지런히 일 하듯 분주히 이곳저곳을 찾아다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그것도 시들해질 때가 온다. 그러면 무료함을 이기지 못해 자신을 구원해 줄 또 다른 일을 찾아 나선다. 마치 부나비가 끊임없이 새로운 불빛을 찾아 헤매는 것 같다. 그런 악순환이 기력이 떨어져 자리에 누울 때까지 이어진다면 불행하고 슬픈 일이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무위의 재능’을 배우는 게 낫지 않을까. 물론 무위가 아무 일도 하지 않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무위(無爲)는 집착하지 않고 일 함을 뜻한다. 그것은 일이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다. 일이 있으면 일을 하고, 일이 없으면 없는 대로 즐긴다. 굳이 새로운 일을 도모할 필요가 없다.


아무 할 일도 없이 직장을 그만 둔다고 하면 사람들이 많이 걱정을 한다. 물론 그것이 진심어린 염려라는 걸 알지만 내 선택을 되돌리고 싶지는 않다. 그리고 사람들이 말하듯 일이 활기찬 생활을 하는데 중요한 요소라는 걸 부정할 생각은 없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긴 시간을 일 없이 지낸다는 것은 비루한 일을 지속하는 것보다 더 힘들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의 나로서는 직장을 계속 유지해도 후회할 것이고, 그만 두어도 후회할 것이다. 인생이란 원래 그런 것이지 않은가. 그렇다면 일찍 매를 맞고 내 나름의 삶을 찾아 즐기고 싶다. 훗날에는 아마 시골에 가서 살게 되겠지만 그 전까지는 일보다는 일 없음의 자유를 즐기고 싶은 게 솔직한 내 심정이다. 그리고 일이 없어도 충분히 멋있게 살 수 있음을 보여주고 싶다. 물론 이렇게 큰 소리를 칠 수 있는 것은 연금이 나와서 기본적인 생활의 보장이 되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나 역시 불안한 미래 때문에 일거리 걱정에서 헤어나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누구처럼 단지 일 하기 위해서 일을 구하지는 않을 것이다.


다행히도 나에게는 다른 사람보다는 ‘무위의 재능’이 더 많이 있는 것 같다. 혼자서도 별로 심심해하지 않고 잘 놀 수 있다는 얘기다. 그러나 그 재능을 믿기보다는 앞으로 새로운 생활에 적응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을 안다. 그동안 관심을 두지 않았던 부엌일도 배워야겠고, 혼자 있기, 심심한 것을 견디기, 낮아짐을 받아들이기 등 일상에서 연습하고 실천해야 할 것들이 많다. 바깥에서 무엇을 새로 시작하기보다는 버리고 비우는 마음공부가 가장 필요하다. 그것이 무위의 즐거움을 누리는 비결이 아닌가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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