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부부 / 문정희

샌. 2009. 2. 23. 07:52

부부란

무더운 여름밤 멀찍이 잠을 청하다가

어둠 속에서 앵하고 모기 소리가 들리면

순식간에 둘이 합세하여 모기를 잡는 사이이다

너무 많이 짜진 연고를 나누어 바르는 사이이다

남편이 턱에 바르고 남은 밥풀꽃 만한 연고를

손끝에 들고

어디 나머지를 바를 만한 곳이 없나 하고 찾고 있을 때

아내가 주저 없이 치마를 걷고

배꼽 부근을 내어미는 사이이다

그 자리를 문지르며 이 달에 너무 많이 사용한

신용카드와 전기세를 문득 떠올리는 사이이다

결혼은 사랑을 무효화시키는 긴 과정이지만

결혼한 사랑은 사랑이 아니지만

부부란 어떤 이름으로도 잴 수 없는

백 년이 지나도 남는 암각화처럼

그것이 풍화하는 긴 과정과

그 곁에 가뭇없이 피고 지는 풀꽃 더미를

풍경으로 거느린다

나에게 남은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다가

네가 쥐고 있는 것을 바라보며

내 손을 한번 쓸쓸히 쥐었다 펴보는 그런 사이이다

부부란 서로를 묶는 것이 쇠사슬인지

거미줄인지는 알지 못하지만

묶여 있는 것만은 확실하다고 느끼며

어린 새끼들을 유정하게 바라보는 그런 사이다.

 

- 부부 / 문정희

 

오늘은 다른 분의 감상문을 빌려야겠다.

 

'바람을 헤치고 비를 맞으며 왔다. 물결 치는 강을 건너기도 했다. 가끔 따뜻한 햇살도 스쳐 지나왔다. 부끄러움을 지우고 부족함을 덮으며 그렇게 낮은 곳으로 오래 흘러왔다. 사랑이란 말도 사치가돼 버렸지만 몸짓과 눈빛 만으로도 생각을 전할 수 있는, 일상의 위대함을 강물처럼 풀어 마음과 마음을 편하게 이어가는, 너무 멀리 와서 돌아가기 어려운 어디쯤, 그곳에 부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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