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어떤 채용 통보 / 반칠환

샌. 2009. 2. 14. 07:58

아무도 거들떠 보지 않는 저를 채용하신다니

삽자루는 커녕 수저 들 힘도 없는 저를,

셈도 흐리고, 자식도 몰라보는 저를,

빚쟁이인 저를 받아주신다니

출근복도 교통비도, 이발도 말고 면도도 말고

입던 옷 그대로 오시라니

삶이 곧 전과(前過)이므로 이력서 대신

검버섯 같은 별만 달고 가겠습니다

미운 사람도 간다니 미운 마음도 같이 가는지 걱정되지만

사랑하는 사람도 간다니 반갑게 가겠습니다

민들레도 가고 복사꽃도 간다니

목마른 입술만 들고, 배고픈 허기만 들고

허위허위 는실는실 가겠습니다

살아 죄지은 팔목뼈 두개 발목뼈 두개

희디희게 삭은 뼈 네 개쯤 추려

윷가락처럼 던지며 가겠습니다

도면 한 걸음, 모면 깡충깡충 다섯 걸음!

고무신 한 짝 벗어 죄 없는 흙 가려넣어

꽃씨 하나 묻어들고 가겠습니다

 

- 어떤 채용 통보 / 반칠환

 

죽음 앞에서 이렇게 겸손하고 부드러울 수 있다면, 살아서도 무슨 일이든 감사히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으랴. 요사이의 불경기 때문인지 특히 '채용 통보'라고 한 표현이 재미있다. 그것은 죽음에 대한 긍정이면서,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신뢰를 보여준다. 흰 뼈를 추려 윷놀이를 하며 가겠다는 발상은 기발하면서도 해학적이다.이 시를 읽으면 마음이 넉넉하고 푸근해진다. 무엇에고 안달하거나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 그런 마음으로 이 세상을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