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아지매는 할매 되고 / 허홍구

샌. 2009. 2. 18. 08:20

염매시장 단골술집에서

입담 좋은 선배와 술을 마실 때였다

 

막걸리 한 주전자 더 시키면 안주 떨어지고

안주 하나 더 시키면 술 떨어지고

이것저것 다 시키다보면 돈 떨어질 테고

그래서 얼굴이 곰보인 주모에게 선배가 수작을 부린다

"아지매, 아지매 서비스 안주 하나 주면 안 잡아먹지"

주모가 뭐 그냥 주모가 되었겠는가

묵 한 사발하고 김치 깍두기를 놓으면서 하는 말

"안주 안 주고 잡아먹히는 게 더 낫지만

나 같은 사람을 잡아 먹을라카는 그게 고마워서

오늘 술값은 안 받아도 좋다" 하고 얼굴을 붉혔다

 

십수 년이 지난 후 다시 그 집을 찾았다

아줌마 집은 할매집으로 바뀌었고

우린 그때의 농담을 다시 늘어놓았다

아지매는 할매 되어 안타깝다는 듯이

"지랄한다 묵을라면 진작 묵지"

 

- 아지매는 할매 되고 / 허홍구

 

시란 인간살이의 핵심을 찌르면서도 재미가 있어야 한다. 저잣거리의 언어로도 이렇게 맛있는시가 만들어진다. 주모의 말에서는 먹물들이 가지지 못한 야성의 싱싱함이 넘쳐난다. 우리는 너무 체면을 살피고 상대방의 반응에 신경을 쓴다. 가면을 쓰고 있어 직설적으로 군더더기 없이 표현하는 데 서툴다.

 

욕쟁이 할매가 인기 있는 것은야성적이고 원시적인 언어가 주는 카타르시스 작용 때문일 것이다. 너무 가려져 있지만 우리 삶의 원형 역시 그러한 게 아닐까. 염매시장 주모는 나한테도 큰소리 칠 것 같다. "지랄한다 너무 재지 말고 살거라잉"

시인의 '늑대야 늑대야'라는 시도 재미있다. 성적 묘사에 자꾸 끌리는 것을 보니 나 역시 아직 늑대가 분명한가 보다.

 

남자는 모두 도둑놈, 늑대라며

늘 경계를 하던 동창생 권여사로부터

느닷없이 소주 한 잔 하자는 전화가 왔다

 

"어이 권여사 이젠 늑대가 안 무섭다 이거지"

"흥 이빨 빠진 늑대는 이미 늑대가 아니라던데"

"누가 이빨이 빠져 아직 나는 늑대야"

"늑대라 해도 이젠 무섭지 않아

나는 이제 먹이감이 되지 못하거든"

 

이제는 더 이상 먹이감이 되지 못해

늑대가 무섭지 않다는 권여사와

아직도 늑대라며 큰소리치던 내가

늦은 밤까지 거나하게 취했지만

우리 아무런 사고 없이 헤어졌다

 

그날 권여사를 그냥 집으로 돌려보낸 것이

두고두고 후회가 되었다

아- 나는 아직도 늑대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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