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살그머니 / 강은교

샌. 2009. 4. 21. 08:31

비 한 방울 또르르르 나뭇잎의 푸른 옷 속으로 살그머니 들어가네

나뭇잎의 푸른 웃도리가 살그머니 열리네

나뭇잎의 푸른 브롯치도 살그머니 열리네

나뭇잎의 푸른 스카프도 살그머니 열리네

나뭇잎의 푸른 가슴호주머니도 살그머니 열리네

 

햇빛 한 자락 소올소올 나뭇잎의 푸른 줄기세포 속으로 살그머니 걸어가네

나뭇잎의 푸른 가슴살을 살그머니 살그머니 쓰다듬네

나뭇잎의 푸른 스카프 폭풍에 펄럭펄럭 휘날리는데

나뭇잎의 푸른 가슴살 살그머니 살그머니 빙하로 걸어가는데

살그머니 살그머니 빙하를 쓰다듬는데

나뭇잎의 푸른 웃도리, 나뭇잎의 푸른 브롯치, 나뭇잎의 푸른 스카프, 나뭇잎의 푸른 가슴호주머니, 나뭇잎의 푸른 피톨들을 살그머니 살그머니 살그머니 감싸안는데

 

살그머니 너의 속살을 벗기고 가슴호주머니를 만지니, 살그머니 열리는 너의 수천 혈관의 문

 

시간이 한층 두꺼워지네

 

우리의 사랑도 살그머니 두꺼워지네

 

- 살그머니 / 강은교

 

빗방울과 나뭇잎, 햇빛과 나뭇잎의 사랑법을 보라. 학교에서 탄소동화작용이라고 배운 것들이 실은 사랑 작용이었구나. 다만 살그머니 사랑이어서 우리가 몰라봤을 뿐이었다. 나는 빗방울이 되고 당신은 나뭇잎이 되고, 나는 나뭇잎이 되고 당신은 햇빛이 되고 싶지 않은가.아무 것도 안 하는 것 같은데 모든 것을 하는 사랑, 내 손길의 온기가 당신의 푸른 피톨까지 전해지는 그런 사랑을 하고 싶지 않은가. 햇빛과 나뭇잎의 사랑처럼, 살그머니 살그머니 살그머니....

'시읽는기쁨'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하늘밥도둑 / 심호택  (0) 2009.04.26
마지막 뉴스 / 서정홍  (0) 2009.04.23
걸림돌 / 공광규  (0) 2009.04.15
대책 없는 봄 / 임영조  (0) 2009.04.09
혼자 가는 먼 집 / 허수경  (0) 2009.04.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