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마지막 뉴스 / 서정홍

샌. 2009. 4. 23. 16:37

시청자 여러분! 그동안 안녕하셨습니까? 지금 막 들어온 긴급 뉴스를 알려드리겠습니다. 차마 고향을 버리지 못하고 농사짓고 살아가던 몇 안 남은 늙은 농민들이, 농사일 힘에 버거워 자기 먹을 농사만 짓기로 결의하고 파업을 한 지 벌써 한 달이 지났습니다. 그래도 사람들은 큰 걱정을 하지 않았습니다. 왜냐면 돈이 있기 때문입니다. 돈만 있으면 수입 농산물을 얼마든지 사 먹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설마 설마 했던 일이 현실로 다가왔습니다. 한국 농민뿐만 아니라 중국, 미국, 인도, 칠레, 세계 모든 농민들이 파업에 동참하는 바람에 마구 들어오던 수입 농산물마저 완전히 끊겨 버렸습니다.

지금 전 세계, 모든 도시는 거의 먹고살기 위한 전쟁터로 변했습니다. 사람들은 굶주린 배를 움켜쥐고 대도시 큰 상점뿐만 아니라 마을 구멍가게까지 침입하여 약탈해 갔습니다. 수십 억 수백 억짜리 예배당 따위도 사람 그림자 조차 찾을 수 없이 텅텅 비었습니다. 이제 평당에 몇 천만원 한다는 고급아파트를 몇 만원에 내놓아도 팔리지 않습니다. 잘 돌아가던 조선소도 자동차 공장도 문을 닫았습니다. 유명하다는 식당도 병원도 약국도 모든 관공서도 모두 문을 닫았습니다.

그나마 불행 가운데 다행인 일은, 양심이 살아 있는 사람들이 함께 살 길을 찾아 흙냄새 물씬 나는 농촌 들녁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도시에서 음식 쓰레기통을 뒤져 살아가던 쥐와 고양이와 새들도, 사람들이 던져 주는 먹이로 살아가던 모든 짐승들도, 그들을 따라가고 있습니다. 밤마다 손님을 받기 위해 잠도 자지 않고 설쳐 대던 편의점과 식당과 술집과 노래주점과 나이트클럽과 온갖 가게들과 화려하고 웅장한 모든 시멘트 건물들이 하나 둘 폐허로 변했습니다.

시청자 여러분! 이제 선택은 여러분의 몫입니다. 우리가, 우리도 모르게 버리고 떠난 고향이 우리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어쩌면 집 나간 아들 기다리듯 오래전부터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도시에서 갖은 쓰레기를 다 만들어 내면서 입으로만 지구를 살려야 한다는 둥 양심을 살려야 한다는 둥 떠들어 대던 신부도 수녀도 목사도 집사도 교사도 교수도 박사도 철학자도 예술가도 시인도 정치인도, 이제야 제정신을 차리고 떠날 채비를 서두르고 있습니다.

시청자 여러분! 도시에서 들려 드리는 마지막 뉴스를 마치겠습니다. 그동안 저희 방송을 끝까지 시청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저희 방송국도 오늘 보따리를 쌌습니다. 그럼 고향에서 다시 뵙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 마지막 뉴스 / 서정홍

현대인의 비극은 땅을 무시하고 땅을 버린 데서 시작되었다.요사이 사람들은 인간이 땅에 발 붙이고, 땅에서 나오는 산물을 먹고 살아야 한다는 기본 사실조차 잊어버린 것 같다. 지금처럼 농촌을 황폐화시킨 현상을 보라. 농자천하지대본이 아니라 기업천하지대본이 되었다. 땅을 포함한 자연은 오직 이득 창출의 수단으로만 취급된다. 인간이 근원에서 멀어졌다는 것을 이것만큼 명쾌하게 보여주는 것도 없다.

농촌이 죽었다는 것은 우리에게 미래가 없다는 말과 같다. 현재 우리나라 식량자급률은 20%대까지 떨어졌다고 한다. 공산품을 팔아 식량을 사오면 된다는 발상 자체가 무섭다.땅과 농업을 무시한다는 것은 자연을 함부로 대한다는 뜻과 같다. 자연을 함부로 대하니 인간 상호간 역시 예외가 아닐 것이다. 그런 사회는 타락하고, 반생명적이고, 비인간적이 될 수밖에 없다.

시인의 바람처럼 경천동지할 사건이라도 생겨서 땅의 소중함을 깨닫게 된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땅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탐욕과 경쟁을 그친다는 뜻이다. 그런 도시의 삶이 껍데기 삶이었음을 자각하는 깨달음이다. 그러나 도시인들이 함께 손에 손 잡고 고향으로 행진하는 꿈은 희망사항일 뿐이라는데 우리의 절망이 있다. 이 거대한 물욕에의 관성이 도저히 멈출 것 같지 않기 때문이다.

시인은 남쪽에서 농사를 짓는 농부 시인이다. 그러나 시인으로보다는 농부로 불리기를 더 좋아한다. 직접 농사를 짓고 시를 쓰며 자발적 가난을 실천하고 계시다고 전해 듣고 있다. '녹색평론'에서 읽은 그분의 글에서 한 구절을 옮긴다.

'마을 어르신께 막걸리 한잔 가득 부어드리며 빈 들녁을 바라보니, 알 수 없는 슬픔이 밀려와 가슴이 먹먹합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하늘에 새들은 날고, 나무들은 돌보는 이 없어도 자라고, 물은 위에서 아래로 쉬지 않고 흘러내립니다. 그런데 사람은, 사람만은, 자꾸만 자연에서 멀어지고 있습니다. 자연이 없으면 한 순간도 살 수 없는 사람이 어느날 갑자기 자연을 버리고 도시 콘크리트 숲에서 서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치고 있으니, 어찌 자연이 사람을 버리지 않겠습니까. 농사지으면서 깨닫습니다. 이제는 자연이 사람을 버린다는 것을. "자연만큼 큰 스승이 없다"고 떠벌리는 부모나 교사들이, 도시 콘크리트 건물 안에 아이들을 짐승처럼 잡아가두어 무얼 가르칠 수 있는지 생각해보면 금세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짓은 사람이 해서는 안될 아주 나쁜 짓이란 걸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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