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대책 없는 봄 / 임영조

샌. 2009. 4. 9. 09:15

무엇이나 오래 들면 무겁겠지요

앞뜰의 목련이 애써 켜든 연등을

간밤엔 죄다 땅바닥에 던졌더군요

고작 사나흘 들고도 지루했던지

파업하듯 일제히 손을 털었더군요

막상 손 털고 나니 심심했던지

가늘고 긴 팔을 높이 뻗어서 저런!

하느님의 괴춤을 냅다 잡아챕니다

파랗게 질려 난처하신 하느님

나는 터지려는 웃음을 꾹 참았지만

마을 온통 웃음소리 낭자합니다

들불 같은 소문까지 세상에 번져

바야흐로 낯 뜨거운 시절입니다

누구 짓일까, 거명해서 무엇하지만

맨 처음 발설한 것은 매화년이고

진달래 복숭아꽃 살구꽃이 덩달아

희희낙낙 나불댄 게 아니겠어요

싹수 노란 민들레가 망보는 뒤꼍

자꾸만 수상쩍어 가보니 이런!

겁없이 멋대로 발랑까진 십대들

냉이 꽃다지 제비꽃 환하더군요

몰래 숨어 꼬나문 담뱃불처럼

참 발칙하고 앙증맞은 시절입니다

나로서는 대책 없는 봄날입니다

 

- 대책 없는 봄 / 임영조

 

내 몸이 왜 이렇게 간지러운가 했더니 봄이었구나. 앵두나무 우물가부터 꽃다지까지 온통 봄바람으로 흔들리고 있다. 어찌할 수 없는 춘정(春情)은 하느님에게도 유혹의 손길을 보낸다. 목련의 애교에 난처해 하시지만 하느님도 싫진 않으셨으리라. 온 천지가 생명의 스캔들로 가득하다.

 

오늘은 가까운 여의도로 꽃구경이나 가야겠다. 그런데 벚꽃년의 간드러진 웃음소리를 어찌 견딜까. 고혹적인 교태를 어찌 볼까. 그래도 마냥 설레기만 하니 참으로 대책 없는 봄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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