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사무원 / 김기택

샌. 2009. 3. 30. 10:59

이른 아침 6시부터 밤 10시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그는 의자 고행을 했다고 한다.

제일 먼저 출근하여 제일 늦게 퇴근할 때까지

그는자기 책상 자기 의자에만 앉아 있었으므로

사람들은 그가 서 있는 모습을 여간해서는 볼 수 없었다고 한다.

점심시간에도 의자에 단단히 붙박여

보리밥과 김치가 든 도시락으로 공양을 마쳤다고 한다.

그가 화장실 가는 것을 처음으로 목격했다는 사람에 의하면

놀랍게도 그의 다리는 의자가 직립한 것처럼 보였다고 한다.

그는 하루종일 損益管理臺帳經과 資金收支心經 속의 숫자를 읊으며

철저히 고행업무 속에만 은둔하였다고 한다.

종소리 북소리 목탁소리로 전화벨이 울리면

수화기에다 자금현황 매출원가 영업이익 재고자산 부실채권 등등을

청아하고 구성지게 염불했다고 한다.

끝없는 수행정진으로 머리는 점점 빠지고 배는 부풀고

커다란 머리와 몸집에 비해 팔다리는 턱없이 가늘어졌으며

오랜 음지의 수행으로 얼굴은 창백해졌지만

그는 매일 상사에게 굽실굽실 108배를 올렸다고 한다.

수행에 너무 지극하게 정진한 나머지

전화를 걸다가 전화기 버튼 대신 계산기를 누르기도 했으며

귀가하다가 지하철 개찰구에 승차권 대신 열쇠를 밀어 넣었다고도 한다.

이미 습관이 모든 행동과 사고를 대신할 만큼

깊은 경지에 들어갔으므로

사람들은 그를 '30년간의 長座不立'이라고 불렀다 한다.

그리 부르든 말든 그는 전혀 상관치 않고 묵언으로 일관했으며

다만 혹독하다면 혹독할 이 수행을

외부압력에 의해 끝까지 마치지 못할까 두려워했다고 한다.

그나마 지금껏 매달릴 수 있다는 것을 큰 행운으로 여겼다고 한다.

그의 통장으로는 매달 적은 대로 시주가 들어왔고

시주는 채워지기 무섭게 속가의 살림에 흔적없이 스며들었으나

혹시 남는지 역시 모자라는지 한번도 거들떠보지 않았다고 한다.

오로지 의자 고행에만 더욱 용맹정진했다고 한다.

그의 책상 아래에는 여전히 다리가 여섯이었고

둘은 그의 다리 넷은 의자다리였지만

어느 둘이 그의 다리였는지는 알 수 없었다고 한다.

 

- 사무원 / 김기택

 

슬픈 우리의 자화상이다. 자본주의나 산업사회는 인간마저 상품화시키고, 인간을 기계부품이나 사무용품 수준으로 전락시켰다. 현대의 많은 직업에서 하는 일이 본질적으로 시에서 나타난 사무원과 다르지 않다고 본다. 삶과 일의 의미를 따지는 일은 부질없어졌다. 우리는 더 이상 자신의 주인이 아니다. 주체적으로 사고하고 성찰하지 못하는 인간은 자본의 제국의 노예일 뿐이다. 이런 인간 소외 현상을 물화(物化)라고 부르고, 장자적 표현으로는 기심(機心)이라고도 한다. 장자가 강조한 것이 바로 '인간 회복 운동', '자유인 운동'이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이라도 왜 사는지를 물어야 한다. 무엇을 위한 고행이고 용맹정진인지를 회의해야 한다. 하나의 인간으로 존재하기 위한 치열한 몸부림이 있어야 한다. 콘크리트처럼 견고하게 구조화된 세상을 깨뜨리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파계(破戒)의 꿈을 꿔야 한다. 그렇다, 파계야말로 가장 파괴적이며 강력한 무기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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