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이라면 주야로 배 저어가고
산이라면 봉이마다 오르는 길 있으련만
사랑의 길눈 어두운 나는
그대에게 가는 길 아직 찾지 못하였습니다.
천하 명금 이마지가 거문고를 타고
허오가 자지러지게 피리를 분들
노심초사 그대 생각뿐인 내 마음 즐겁지 않으니
영명한 한의사는 내게 사랑의 묘약 한 재 지어주며
사랑의 길눈 밝아지랍니다.
지은 정성 달이는 정성 마시는 정성으루다
사랑의 길눈 밝아져서 그대 나라에 잘 들어가랍니다.
용한 한의사의 처방대로
햇빛 쨍쨍하고 산들바람 부는 날 받아
사랑의 묘약 달이기를 합니다.
진흙으로 빚은 약탕관에 천년설봉 얼음 녹여
사랑의 묘약 털어넣은 후
하루 스물네 시간에 돋은 그리움 썰어넣고
스무 날 우거진 오매불망 구엽초도 비벼넣고
석 달 열흘 무성한 그리움 잘라넣고
삼 년 묵은 섭섭함
오 년 묵은 상처도 뽑아넣고
칠 년간 미련이며
구 년된 슬픔도 다져넣고
참나무 숯불에 괄개괄개 달이니,
아 사랑의 길눈 밝아지고 있는지
약탕관에 흐르는 눈물
스무아흐레 동안 그치지 않았습니다.
- 약탕관에 흐르는 눈물 / 고정희
시인이 지향했던 세계에 대한 선입견 때문인지 이 시가 단순히 한 남정네를 그리워하는 것으로는 읽혀지지 않는다. 신학대학을 다녔던 시인은 한때 기독교적 이상이 실현된 사회를 꿈꾸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 뜻에서 시에 나오는 '그대 나라'는 '하느님 나라'로 읽힌다. 또 시인이 묻는 사랑의 길은 '따뜻한 새 세상으로의 길'로 보인다. 그러나 시인은 현재의 기독교 모습에 실망하고 여러 모습으로 강하게 비판을 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시인의 간절한 그리움이 어떤 것인지 어렴풋이나마 짐작이 간다. 또한 미숙하지만 나 자신의 경험과도 공유되는 바가 있어 이 시는 더욱 절절히 읽힌다.
이 시에서 중요한 것은 대상이 무엇이냐가 아니라 시인의 간절히 사모하는 마음이다. 천년설봉 얼음 녹여지극정성 그리움으로사랑의 묘약을 달이며 스무아흐레 눈물을 그치지 않았다 했다.애틋하고 안타깝고 아름답다. 그런 간절함이라면 그 대상이 사람이든 형이상학적 가치든 모든 것이 하나로 통할 것 같다. 그리고 시인은 그 지극한 마음 하나로 이미 '그대 나라'에 든 것은 아닐까. 약탕관을 달인다는 표현도 그렇지만 왠지 이런 고전적인 마음씀이 그리워지고 또 닮고 싶은 이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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