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랭 드 보통의 소설 <우리는 사랑일까>는 남녀 사랑의 탐구생활이다. 사랑하는 두 남녀의 심리를 분석하고 설명하는 것이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의 소설판 같기도 하다. 여자 주인공인 엘리스가 에릭과 만나 사랑하고 이별하는 이야기인데 일반적인 연애소설과 다른 점이라면 사랑의 과정을 심리학적, 철학적 지식을 동원해 분석하고 있다는 것이다. 원제목이 ‘The Romantic Movement’인데 결코 로맨틱하지는 않다. 그래서 어떤 독자에게는 재미없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저 달콤한 연애 이야기만 기대한다면 이 책은 보지 않는 게 나을지 모른다.
눈에 콩깍지가 낀다고 표현하듯 사랑은 환상에서 시작된다. 에릭이 구두끈 매는 모습을 보면서 엘리스는 이렇게 귀엽게 구두끈을 매는 사람을 찾아내다니, 꿈이 아닌가, 하고 황홀해 한다. 그러다가 달콤한 밀월기간이 지나면 대화가 통하지 않게 되고 상대가 낯설게 느껴진다. 에릭은 엘리스의 방해를 받는 걸 싫어하고 엘리스는 그런 에릭을 이해하지 못한다. 엘리스와 에릭의 갈등은 누구의 책임이라기보다는 전형적인 여자와 남자의 기질 차이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을 읽는 누구나 나의 이야기로 받아들여진다. 문제가 해소되지 못하고 점점 앙금이 쌓으면 결국은 종착역에 다다른다.
저자는 사랑의 과정을 해부용 메스를 대듯 날카롭게 분석한다. 꽃을 과학적으로 분석한다고 해서 아름다움의 본질을 설명하지 못하듯이 사랑을 학문적으로 해부한다고 해서 사랑을 더 잘 이해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이 책을 읽는다고 사랑을 더 잘 하게 되지도 않을 것이다. 어떤 때는 지식이 병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저자가 사랑에 접근하는 관점이 여타 소설과 달리 신선하다. 인간과 사랑을 바라보는 저자의 애정과 해박한 지식은 높이 살 만 하다.
책에는 의표를 찌르는 구절들도 많이 나온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그녀는 그 남자에게 매력적으로 보이고 싶었지만, 역설적으로 그 남자가 자신의 곁에 있는 궁극적인 이유가 육체적인 매력이 아니기를 바랐다.’ 그리고 여자가 “피곤하네요.” 이렇게 말했을 때 거기에는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가장 풍부한 의미가 들어있다는 것이다. 엘리스가 필립과 데이트를 하며 바로 그 말을 썼다. 필립의 집에서 둘이만 있었던 상황이었다. 이때 엘리스가 나타내고자 한 뜻은 다음 네 가지 중 하나일 것이다.
1. 성마른 신호일 수 있다. ‘들어봐요, 필립. 나는 알아차렸는데 당신은 모르겠어요? 밤새 여기 앉아서 세계에서 가장 긴 강 이야기나 하는 걸 내가 재미있어 한다고 정말로 생각해요? 어떻게 좀 해봐요.’
2. 혹은 그녀가 그 남자 옆에 앉아 있고 좀 전에 둘의 무릎이 스쳤지만, 그 이상으로 발전하는 것은 원치 않음을 필립에게 일깨워주려는 뜻일 수도 있다.
3. 혹은 이제 가야겠다는 말을 꺼내는 방법일 수도 있다. 가고 싶어서가 아니라, 필립이 가지 말라고 붙잡도록 채근하는 것일 수도.
4. 혹은 [이런 상황에서 가장 그럴듯하지 않지만] 단지 정말로 피곤하다는 뜻일 수도 있다.
그러나 불쌍한 필립은 첫 번째 의미로 받아들였고 엘리스의 호의를 얻지 못했다. 아니 엘리스도 첫 번째 사인을 보냈지만 중간에서 마음이 변했을 수도 있다. 엘리스의 피곤하다, 는 말은 여자의 책임 떠넘기기라는 고단수의 행위일지도 모른다. 결국 엘리스는 필립이 호감과 연애 감정을 혼동해서 우정을 망쳤다고 핑계 대면서 자신의 그런 양면성을 묻어버렸다. 책은 이런 남녀 심리 변화와 내막을 속속들이 파헤치며 설명한다. 어찌 되었든 남자가 볼 때 여자의 언어는 난해한 게 사실이다.
‘우리는 사랑일까’라는 우리 말 제목도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한다. 사랑한다고 말 할 때 사랑하는 대상을 우리는 얼마나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을까? 엘리스의 경우에 에릭을 사랑한다는 것은 에릭 자체가 아니라 자신의 사랑하는 감정을 사랑하는 것으로 보인다. 에릭은 단지 조연배우였는지 모른다. 그 배우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시 다른 배우를 찾아 나선다. 우리는 사람이든 사물이든 순수한 눈으로 보기 보다는 그저 익숙한 눈으로 본다. 보고 느끼는 것은 실재가 아니라 우리 마음의 투영물일 뿐이다. 그런 점에서 완전한 사랑은 무아(無我)의 경지와 연결되어 있다. 자신을 벗어날수록 상대에 진실히 접근할 수 있다.
에릭에게 이별을 통고한 엘리스는 따뜻하고 배려 많은 필립을 만난다. 둘의 새로운 사랑은 시작된다. 새 출발하는 모습이 아름답다. 존재로서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사랑을 통해 점점 성숙해져 간다. 그것이 사랑의 위대한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