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늙어가는 아내에게 / 황지우

샌. 2009. 5. 25. 11:13

내가 말했잖아.

정말, 정말, 사랑하는, 사랑하는, 사람들.

사랑하는 사람들은,

너, 나 사랑해?

묻질 않어

그냥, 그래,

그냥 살아

그냥 서로를 사는 게야

말하지 않고, 확인하려 하지 않고,

그냥 그대 눈에 낀 눈꼽을 훔치거나

그대 웃깃의 솔밥이 뜯어주고 싶게 유난히 커보이는 게야

생각나?

 

지금으로부터 14년 전, 늦가을,

낡은 목조 적산 가옥이 많던 동네의 어둑어둑한 기슭,

높은 축대가 있었고, 흐린 가로등이 있었고

그 너머 잎 내리는 잡목 숲이 있었고

그대의 집, 대문 앞에선

이 세상에서 가장 쓸쓸한 바람이 불었고

머리카락보다 더 가벼운 젊음을 만나고 들어가는 그대는

내 어깨 위의 비듬을 털어주었지

그런거야, 서로를 오래오래 그냥, 보게 하는 거

그리고 내가 많이 아프던 날

그대가 와서, 참으로 하기 힘든, 그러나 속에서는

몇 날 밤을 잠 못 자고 단련시켰던 뜨거운 말:

저도 형과 같이 그 병에 걸리고 싶어요

 

그대의 그 말은 에탐부톨과 스트렙토마이신을 한 알 한 알

들어내고 적갈색의 빈 병을 환하게 했었지

아, 그곳은 비어있는 만큼 그대의 마음이었지

너무나 벅차 그 말을 사용할 수조차 없게 하는 그 사랑은

아픔을 낫게 하기보다는, 정신없이,

아픔을 함께 앓고 싶어하는 것임을

한 밤, 약병을 쥐고 울어버린 나는 알았지

그래서, 그래서, 내가 살아나야 할 이유가 된 그대는 차츰

내가 살아갈 미래와 교대되었고

 

이제는 세월이라고 불러도 될 기간을 우리는 함께 통과했다

살았다는 말이 온갖 경력의 주름을 늘리는 일이듯

세월은 넥타이를 여며주는 그대 손끝에 역력하다

이제 내가 할 일은 아침 머리맡에 떨어진 그대 머리카락을

침묻은 손으로 짚어내는 일이 아니라

그대와 더불어, 최선을 다해 늙는 일이리라.

우리가 그렇게 잘 늙은 다음

힘없는 소리로, 임자, 우리 괜찮았지?

라고 말할 수 있을 때, 그 때나 가서

그대를 사랑한다는 말은 그 때나 가서

할 수 있는 말일 거야.

 

- 늙어가는 아내에게 / 황지우

 

얼마전에 황지우 시인이 한국종합예술학교 총장직을 사퇴했다. 한 달이 넘는 표적 감사를 통해 거의 반강제로 현정권에 의해 쫓겨난 것이다. 이번 사건은 저들이 말하는 소위 좌파 인사 쫓아내기 정책의 일환이라는 것은 누구나 안다. 정말 해도 너무 하는 정권이다. 하긴 전직 대통령까지 죽음으로 내몬 정권이니 못 할 일이 무엇이 있을까.

 

사랑하는 것도 미워하는 것도 힘든 세상이다. 황 시인이 19일에 발표한 총장직 사퇴문에서 '새들도 세상을 뜨는 시간이 도래한 것인가?'라는 한탄은 바로 오늘의 슬픔을 예언한 것 같다. 그러나 무소불위로 휘두르는 죽음의 칼날도 언젠가는 녹이 슬고 꺾어질 것이다. 자신들의 권력이 영원할 것이라 오판하지 말아라.

 

아래는 황 시인의 사퇴문이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직을 사퇴합니다.

참 이상한 감사였다. 지난 3월 18일부터 5월 1일까지 한국예술종합학교는 문화관광체육부 감사실 감사를 받았는데 10명의 감사자들이 6주 넘게 투입된, 집중적이며 장기간에 걸친 이런 '융단폭격식 감사' 는 학교 설립 17년 연혁 가운데 그 유례가 없는 것이었다.

감사 후반기에 접어들자 이번 감사의 최종 도착지가, 1) 총장퇴진과 2)한예종 구조개편을 겨냥한, 전형적인 표적감사라는 것이 노골화 되었다. 3월 초 문화부 모 국장이 학교를 찾아왔다. 총장 거취, 어떻게 할 거냐는 거였다. 나는 당장이라도 그만 두고 싶고, 언제든지 사퇴하겠다. 다만 여기가 학교다. 3200여명의 학생이 있고 그 학부모들이 계시고 4년간의 교육을 믿고 맡긴 교육 수요 주체(국민)와의 약속과 신뢰가 존중되어야 하는 곳이다.

정부 정책을 집행하는 여느 소속기관과 다르다. 정권이 바뀌었다고 해서 서울대나 경북대 같은 국립대 총장이 바뀌어야 하는가? 대학 총장은 존재하는 것만으로 기능하는 일종의 상징의 자리이기 때문에 내년 2월까지의 그 임기를 지켜주는 것이 학내 동요 없이, 또 총장 퇴진을 둘러싼 사회적 소음을 차단하고 교육에 전념할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하며,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표명한 바 있다.

그가 돌아갔고, 이내 감사가 들어왔다. 처음에는 환영했다. 종합검진처럼 잘 받으면 그만큼 한국예술종합학교의 건강성이 입증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건강 검진이 아니라 생체 해부에 가까운 쪽으로 흘러갔다. 감사 기간 중 내가 제일 우려한 것은 총장 퇴진을 압박하는, 나에 대한 오물 뒤집어 씌기가 아니었다. 참으로 걱정스럽고 심각한 것은 감사의 과녁이 제도 개선이라는 이름으로 한예종 학사조직 개편 내지 리모델링에 놓여 있었다는 점이다. 실제로 감사팀의 최종 확인서 28건 가운데 1/3이 넘는 10건이 여기에 집중되어 있었다.

어제, 5월 18일 저녁 6시에야 문화부로부터 한국예술종합학교 종합감사 결과 통보를 받았다. 12건의 주의, 개선, 징계 처분이요구된 문서 가운데 U-AT 통섭교육 중지, 이론과 축소/폐지, 서사창작과 폐지 등 상당수가 대학 교육의 자율성과 본교의 교권에 대한 침해 소지가 있어 보인다. 감사 기간 중 이에 대해 사실과 교육학적 근거에 의해 소명한 내용들이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본교는 관련 법과 절차에 따라 이의 신청을 하는 등, 이에 적극 대응해 갈 것이지만, 이미 어떤 방향을 정해 놓고 밟고 가려는 문화부의 저돌성이 위험스럽기까지 하다. "이론과를 폐지하고 실기교육을 강화하는 등 한예종 구조 전반에 대한 리모델링을 해당국/실에서 추진하겠다."는 문화부 감사관 발언에 나는 경악을 금치 못한다.

예산집행이나 행정절차에 관한 감사 지적은 얼마든지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러나 매우 섬세하고 특수한 예술교육 분야에서 아카데믹 시스템이나 교육 프로그램을 행정관료들이 손보려 하다니, 나는 거기서 파생될 우리 문화의 전반적인 반달리즘이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98년 이후지금까지 한국예술종합학교 학생들이 국내외 유수 콩쿨, 각종 경연에서 1위 수상자만 473명에 이른다. 특히 2006년 김선욱의 리즈 국제 피아노 콩쿨 우승 이래로 음악, 무용, 건축, 영화, 애니메이션 부분에서 세계 최정상을 등정하고 온, 그야말로 '창조적 소수' 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국내 교육만으로 그 동안 우리 안에 내재된 세계성을 입증하는, 경이로운 성과들이다. 나는 감히 말하건대 본교는 이제 어느덧 세계급대학(World Class Univ.)에 진입했다고 생각한다. 설립 17년밖에 안된 한예종이라는 이 황금나무의 苗板(묘판-한예종)을 더 이상 흔들지 말아줬으면 좋겠다.

한국예술종합학교는 이제 내 것 네 것에 속한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 소중히 해야 할 사회적 자산이기 때문이다. 나는 30년 넘게 미학 책을 읽었고, 또 창작 현장에서 자라난 더듬이를 가지고 앞으로 우리 동시대 예술이 어디로 갈 것 같고, 그래서 우리 예술교육은 어디로 가야 할 것인가를 꽤나 암중모색했다. 지난 3년간 총장으로서 나는 우리 예술교육이 글로벌 스탠다드보다 더 앞으로 점프해서 그것을 뒤돌아 보면서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고, 그런 비전을 한에종 제 2도약을 위한 디딤돌로 삼으려 무진 애썼다 하겠다. 내 역량의 한계도 있었겠지만, 이러한 퀀텀 점프를 위한 시도가 지금 문화부 감사에 의해 완전히 봉쇄된 지경에 이르렀다.

식물 상태에 빠진 총장직에 앉아 있다는 게 더 이상 의미도 없고, 무엇보다도 나로 인하여 본교에 몰려있는 수압을 덜어 주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오늘 나는 결심했다. 다시금 우리 사회에, 새들도 세상을 뜨는 시간이 도래한 것인가? 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직을 사퇴한다. 다만 3년 전 본교 교수님들의 민주주의적 총의로 세운 총장직을 끝내 지키지 못하고 학교 연혁에 중도하차라는 흉터를 남기게 되어, 우리 교수님들, 학생들, 학부모님들께 참으로 송구스러울 따름이다.

2009년 5월 19일 황지우

'시읽는기쁨' 카테고리의 다른 글

조장 / 김선태  (0) 2009.06.05
묵념 5분 27초 / 황지우  (0) 2009.05.29
깃발 / 유치환  (0) 2009.05.20
아버지의 그늘 / 신경림  (0) 2009.05.13
엄마 걱정 / 기형도  (0) 2009.05.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