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아버지의 그늘 / 신경림

샌. 2009. 5. 13. 09:09

툭하면 아버지는 오밤중에

취해서 널브러진 색시를 업고 들어왔다,

어머니는 입을 꾹 다문 채 술국을 끓이고

할머니는 집안이 망했다고 종주먹질을 해댔지만,

며칠이고 집에서 빠져나가지 않는

값싼 향수내가 나는 싫었다

아버지는 종종 장바닥에서

품삯을 못 받은 광부들한테 멱살을 잡히기도 하고,

그들과 어울려 핫바지춤을 추기도 했다,

빚 받으러 와 사랑방에 죽치고앉아 내게

술과 담배 심부름을 시키는 화약장수도 있었다.

 

아버지를 증오하면서 나는 자랐다,

아버지가 하는 일은 결코 하지 않겠노라고

이것이 내 평생의 좌우명이 되었다,

나는 빚을 질 일을 하지 않았다,

취한 색시를 업고 다니지 않았고,

노름으로 밤을 지새지 않았다,

아버지는 이런 아들이 오히려 장하다 했고

나는 기고만장했다, 그리고 이제 나도

아버지가 중풍으로 쓰러진 나이를 넘었지만,

 

나는 내가 잘못했다고 생각한 일은 없다,

일생을 아들의 반면교사로 산 아버지를

가엽다고 생각한 일도 없다, 그래서

나는 늘 당당하고 떳떳했는데 문득

거울을 쳐다보다가 놀란다, 나는 간 곳이 없고

나약하고 소심해진 아버지만이 있어서,

취한 색시를 안고 대낮에 거리를 활보하고,

호기있게 광산에서 돈을 뿌리던 아버지 대신,

그 거울속에는 인사동에서도 종로에서도

제대로 기 한번 못 펴고 큰 소리 한번 못 치는

늙고 초라한 아버지만이 있다.

 

- 아버지의 그늘 / 신경림

 

나는 중학생 때부터 집에서 나와 소위 유학 생활을 했으니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많지는 않다. 아버지는 몇 달만에 한 번씩 만나는 멀고도 가까운 존재였다. 그리고 초등학교 시절의 기억은 대부분 소멸되었다. 또 아버지가 돌아가신지도 이미30년이 되었다. 지금까지 몇 몇 단편적으로 남아 있는 기억은 아버지의 온전한 모습은 아닐 것이다.

 

얼마 전에 초등 동기로부터 아버지의 또 다른 모습을 듣고는 깜짝 놀란 적이 있었다. 약주만 드시면 호쾌해지시고 욕도 잘 하셨다는 것이다. 내가 기억하는 아버지는 늘 자식 앞에서 단정하고 엄격하셨다. 시인처럼반면교사로 삼을 아버지는 전혀 아니었다. 아버지는 면사무소에 나가시랴, 농사 지으시랴, 엄청나게 부지런하셨다. 동네 사람 어느 누구도 아버지의 근면함을 따라올 수 없었다. 그래서 어머니가 시집왔을 때 끼니를 걱정해야 할 정도로 가난했던 살림이 아버지대에는 부자 소리를 들을 정도로 재산을 일구셨다. 억척같기는 어머니도 마찬가지였지만.

 

우리가 크던 시절의 아버지들은 술주정뱅이에 큰소리 잘 치고 난폭한 경우가 흔했다. 그런 아버지는 아이들에게 무섭고 두려운 존재였다. 심지어 아버지는 시인처럼 증오의 대상이었고 없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 정도였다. 그런 아버지 밑에서 자란 친구들이 다들 착하고 제 노릇하는 어른이 되어 있는 걸 보면 신기할 정도다. 다행히 나는 어릴 때 부모로부터 욕을 듣거나 매를 맞은 기억이 거의 없다. 그렇다고 따스한 사랑을 받지도 못했다. 그 시절의 아버지에게서 그런 애정 표현까지 기대하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 어쨌든 나는 부모를 잘 만난 행운아인 셈이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처음 만난 한 동기는 나를 보더니 예전의 아버지 얼굴과 똑 같다고 했다. 나이가 들수록 왠일인지 부모의 모습을 자꾸 닮아지는 것 같다. 어느덧 나도 아버지 돌아가실 즈음의 나이가 되었다. 자식은 아버지의 내면을 헤아리지 못한다. 어렸을 때는 속 깊은 정을 읽을 수 있는 나이가 아니었다. 지금 내 자식도 나를 보는 눈이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러나 이만큼 살다보니 당시의 아버지도인생살이의 고민이 많았을것이며 힘들었을 것이라는 게 이제야 생각이 미친다. 아무리 못난 아버지라도 세월은 아버지를그리움과 연민의 대상으로 바꾼다.

 

많이 배우고 나이가 들수록 아버지로부터 점점 멀어지고 있고 멀어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반대로 아버지의 구심력에 끌려 나는 점점 아버지를 닮고 있다. 아버지와 닮은꼴의 그늘을 만들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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