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깃발 / 유치환

샌. 2009. 5. 20. 13:43

이것은 소리없는 아우성

저 푸른 해원을 향하여 흔드는

영원한 노스탤지어의 손수건

순정은 물결같이 바람에 나부끼고

오로지 맑고 곧은 이념의 푯대 끝에

애수는 백로처럼 날개를 펴다

아! 누구던가?

이렇게 슬프고도 애달픈 마음을

맨 처음 공중에 달 줄을 안 그는

 

- 깃발 / 유치환

 

거센 바람에 펄럭이는 깃발을 보고 두 스님이 논쟁을 하고 있었다. 한 스님은 바람이 움직이는 것이라 했고, 다른 스님은 깃발이 움직이는 것이라 했다. 이에 육조 혜능선사가 말했다. "바람이 윰직이는 것도, 깃발이 움직이는 것도 아닙니다." "그럼 무엇이 움직인다는 말입니까?"혜능이 답했다. "두 사람 마음이 움직이는 것입니다."

 

시인이 본 깃발이나 혜능선사가 본 깃발이나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펄럭이는 깃발에서 마음을 읽은 것이다. 시인은 진리나 이상향에 대한 동경과 함께 거기에 이를 수 없는 인간적 한계에 대해 말하고 있다. 깃대에 묶여서 꼼짝 못하고 펄럭일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의 운명이다.

 

장자에 보면 바람을 타고 날아가는 얘기가 여럿 나온다. 모두 초월자를 상징하는 장면들이다. 그러나 보통 사람들이야 바람을 타기는 커녕 도리어 그들을 비웃는 메추라기일 뿐이다. 그렇게 마음 편하게 살아갈 수 있다면 그것도 행복이리라. 그러나 어떤 사람에게는 이상과 현실의 괴리가 힘들고 괴롭다. 그는 끊임없이 펄럭이는 마음속의 깃발을 의식하지만 또한 한 발자국도 전진하지 못하는 자신을 본다. 인간 존재의 한계 앞에서 무력하기만 한 자신이 슬프다.

 

그러나 비록 매여있을지언정 펄럭일 수 있음이 인간이다. 그것마저 아니라면, 그래서 펄럭이지 않는 안정이고 평화라면 난 거부할 것이다. 슬프고 애달픈 심정으로 오늘도 내 가슴 속의 깃발은 펄럭이고 있다. 이루어질 수 없는 그 무엇인가를 갈망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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