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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은 간다

오늘이 입하(立夏)다. 어느덧 봄날은 가고 여름으로 접어들고 있다. 얼마 전에 영화 '봄날은 간다'를 다시 봤다. 일흔줄에 들어서서 보는 영화는 20년 전과는 느낌이 좀 달랐다. 조연 정도로 여겼던 치매 걸린 할머니가 이번에는 비중있게 다가왔다. 두 젊은이의 사랑이 인생의 짧은 한 때의 에피소드라면, 할머니에게는 인생 전체가 걸린 '봄날은 간다'였기 때문이다. 매일 기차역으로 나가 죽은 남편을 기다리던 할머니는 사랑에 아파하는 손주를 위로한다. "버스 하고 여자는 떠나면 잡는 게 아니란다." 이 영화에 명대사로 회자되는 것이 여럿 있지만("라면 먹고 갈래요?"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 이 할머니의 대사도 심금을 울렸다. 제정신이 돌아왔을 때 당신에게 하고픈 말이기도 했을 것이다. 할머니는 자신이 갈 때..

읽고본느낌 11:14:59

봄날의 동네 걷기

봄이 한창인 때, 동네 걷기에 나섰다. 우리 동네는 현대와 과거의 모습이 공존하고 있다. 집에서 살짝만 벗어나도 옛날 시골 마을 풍경과 만난다. 전에는 과수원, 논밭이 있었지만 몇 년 전에 논이 사라지고 아파트가 들어섰다. 그래도 아직은 농촌 모습이 적게나마 남아 있어 다행이다. 과수원의 복사꽃은 막바지다. 꽃잎은 대부분 낙화하고 일부만 가지에 달려 있다.  걷는 중에 겹벚꽃이 핀 벚나무를 세 그루 만났다. 늦게 보는 벚꽃이 솜사탕 마냥 풍성하고 달콤했다. 꽃그늘 아래에서 위를 쳐다보니 "와"하는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예쁜 창문을 가진 집은 유치원 건물이다.  마을을 지나 신록 가득한 뒷산으로 올라갔다.  뒷산을 넘어 건너편에 있는 이웃마을까지 가려한다. 이번에..

사진속일상 2024.04.24

뒷산에 스며드는 봄

봄이 가까이 다가왔다. 스며드는 봄기운을 느끼려고 뒷산에 올랐다. 두꺼운 점퍼를 벗고 가벼운 바람막이 옷을 입어도 될 정도가 되었다. 따스한 햇살이 얼굴을 간질이고 바람은 땀을 식혀주기에 적당했다. 어느 해나 그러하듯이 뒷산의 봄은 생강나무꽃이 제일 먼저 보여준다. 진즉에 피었을 것이지만 당분간은 진노랑 색깔을 뽐내며 봄의 도래를 알릴 것이다. 꽃에 코를 대니 고운 향기가 몸 안으로 들어온다. 흰털괭이눈도 수줍게 꽃을 피웠다. 얘는 해가 갈수록 개체수가 줄어들어 안타깝다. 어린 솔잎도 새 봄을 맞아 윤기로 반들거린다. 지금은 키가 두 뼘 정도 되지만 올해가 지나면 훌쩍 커 있을 것이다. 보이지는 않지만 박새의 지저귀는 소리도 연신 따라온다. 시각, 청각, 후각, 촉각으로 뒷산에 찾아온 봄을 느껴본다. 봄..

사진속일상 2024.03.18

우리 동네 첫 산수유꽃(2024/3/10)

우리 동네에도 산수유꽃이 피기 시작했다. 남녘에서는 만개한 꽃소식이 들리지만 여기는 아직 봄을 실감하지 못하고 있다. 그나마 나무 꽃 중에서는 산수유가 제일 먼저 춘신(春信)을 전해준다. 옆에 있는 목련은 꽃봉오리가 기름칠을 한 듯 반들반들하다. 얼마 안 있어 터지기 시작하면 바라보는 사람을 혼미하게 만들 것이다. 겨울 잠바를 입고 외출했더니 등에 땀이 배었다. 봄이 성큼 가까이 왔다.

꽃들의향기 2024.03.10

집 앞에서 만난 올해 첫 봄꽃

시내에 나가 이발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 집 앞에서 올해 첫 봄꽃을 만났다. 길 옆 양지바른 곳에 개불알풀꽃 여남은 송이가 피어 있었다. 아직 때가 이른 탓인지 낮은 기온에 잔뜩 지실이 든 모습이었다. 만물이 겨울잠에서 깨어난다는 경칩이 오늘이다. 잔뜩 찌푸린 채 간간이 가는 비도 뿌리는 날씨다. 강원도에는 많은 눈이 내린다는 예보다. 남부 지방에서는 예년보다 이른 꽃소식이 들리지만 여기는 아직 봄을 체감하기에는 빠르다. 하지만 얼마 남지 않았다. 조금만 지나면 팝콘 터지듯 봄꽃들이 팡팡 피어날 것이다. 생명이 약동하는 광경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설렌다. 이 세상에 나와서 일흔 번 넘게 봄을 맞고 있다. 젊었을 때와 달리 나이를 먹을수록 봄의 감흥이 애틋한 쪽으로 기운다. 앞으로 몇 번이나 봄을 더 볼 수..

사진속일상 2024.03.05

넉 달만에 뒷산을 걷다

어제는 갑자기 봄이 찾아온 듯 날씨가 따뜻했다. 전국의 낮 기온이 20도에 이르렀고, 곳곳이 2월 최고기온을 기록했다. 길거리에는 반바지 차림의 젊은이도 있었다. 밖은 완연한 봄기운이었다. 따스한 기운에 이끌려 뒷산을 걸었다. 얼마나 겨울잠이 깊었는지 넉 달만이었다. 적당한 눈비가 찾아준 올 겨울이어서 물기 촉축한 산길은 폭신했다. 맨발 걷기를 하는 분들을 자주 만났다. 아직 산의 나무들은 겨울 모습이었지만, 오감으로 느껴지는 봄소식이 날 이토록 설레게 하다니... 쯔쯧, 박새가 나뭇가지를 옮겨가며 노래 부르는 소리가 정겨웠고 양지바른 곳에 봄꽃이 피지 않았을까, 자꾸 두리번거렸다. 지지난주에는 홍릉에 복수초가 피었다는 소식도 들었다. 인간 세상이 하 수상해도 어김없이 봄은 온다. 기특하고 감사한 일이다.

사진속일상 2024.02.15

봄날은 갔네 / 박남준

봄비는 오고 지랄이야 꽃은 또 피고 지랄이야 이 환한 봄날이 못 견디겠다고 환장하겠다고 아내에게 아이들에게도 버림받고 홀로 사는 한 사내가 햇살 속에 주저앉아 중얼거린다 십리벚길이라던가 지리산 화개골짜기 쌍계사 가는 길 벚꽃이 피어 꽃 사태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피어난 꽃들 먼저 왔으니 먼저 가는가 이승을 건넌 꽃들이 바람에 나풀 날린다 꽃길을 걸으며 웅얼거려본다 뭐야 꽃비는 오고 지랄이야 꽃대궐이라더니 사람들과 뽕짝거리며 출렁이는 관광버스와 쩔그럭 짤그락 엿장수와 추억의 뻥튀기와 뻔데기와 동동주와 실연처럼 쓰디쓴 단숨에 병나발의 빈 소주병과 우리나라 사람들 참 부지런하기도 하다 그래그래 저렇게 꽃구경을 하겠다고 간밤을 설렜을 것이다 새벽차는 달렸을 것이다 연둣빛 왕버드나무 머리 감는 섬진강가 잔물결마저 ..

시읽는기쁨 2023.05.04

동네 봄꽃 산책

어제 비 내린 뒤 대기가 깨끗해지면서 화창한 봄날이 열렸다. 그간 궂은 날씨가 이어지다가 오랜만에 환한 햇살이 반짝이는 날씨다. 아침 식사를 하고 동네 봄꽃 산책을 나선다. 동네 뒤편에 복숭아 과수원이 있다.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복사꽃이 화사하다. 어느 집 정원에 핀 겹벚꽃이 눈길을 끈다. 마침 집 현관을 나오는 주인에게 양해를 얻고 들어가 나무 가까이에서 꽃을 감상하다. 눈부시게 고운 색깔이다. 정확한 이름은 왕겹벚꽃이라고 알려준다. 옆에 진홍색 꽃이 있어 물어보니 복숭아와 벚나무를 접 붙인 나무라고 한다. 사실인지 의아할 정도로 둘과는 느낌이 전혀 다른 꽃이다. 집에 와서 자료를 찾아보니 만첩홍도(꽃복숭아)인 것 같다. 이건 꽃사과겠지. 꽃잔디 색깔도 화려하고, 향기에 이끌려 가 보니 수수꽃다리가 ..

사진속일상 2023.04.19

탄천 벚꽃

토요 번개 모임이 있어 야탑에 나간 길에 전후로 짬을 내어 탄천 벚꽃을 구경하다. 수도권에서는 지금이 벚꽃의 절정이다. 이맘 때 탄천은 어딜 가나 벚꽃 속에 파묻힌다. 오늘 낮기온은 26℃까지 올라 초여름 날씨를 방불케 했다. 다음주 중반에는 전국에 비가 내린다니 벚꽃이 곁에 있을 날도 며칠 남지 않았다. 탄천의 지류 중 하나인 여수천을 걸으며 만난 2023년 봄 풍경이다.

꽃들의향기 2023.04.01

봄 물드는 탄천

분당 토요 모임에 가는 길에 탄천에 들렀다. 개나리와 목련은 활짝 폈고, 벚꽃도 피기 시작했는데 만개한 벚나무도 있었다. 봄소식이 고속 KTX를 타고 북상하고 있는 듯하다. '소곤소곤 산책길'에는 미국제비꽃이 환하게 웃고 있었다. 우리 아파트의 벚꽃도 오늘 개화를 했다. 예년에 비해 열흘 가량 빠른 것 같다. 지구온난화 탓이 아닌가 싶어 꽃을 바라보는 심정이 편하지는 않다. 그만큼 3월 기온이 높았다. 다음 주면 수도권에서도 벚꽃이 만개하지 않을까 싶다. 오늘 야외에서는 반팔 차림을 한 사람들도 자주 눈에 띄었다. 씩씩한 새인 직박구리는 벚꽃을 좋아하는 것 같다. 이 가지 저 가지로 힘차게 날아다니면서 벚꽃을 쪼아먹는다. 언제 죽게 될까, 라는 생각을 자주 한다고 늦은 점심을 먹는 자리에서 S가 말했다...

사진속일상 2023.03.25

봄이 오는 소리

바둑과 당구로 놀기 위해 분당에 나갔다가 여수천 길가에서 활짝 핀 홍매를 봤다. 봄이 이미 이렇게 가까이 왔구나, 하고 화들짝 놀랐다. 오늘 낮 기온은 20도 가까이 올라서 두껍지 않은 점퍼인데도 답답하게 느껴졌다. 이제 곧 생명의 합창이 봇물 터지듯 뿜어져 나올 것이다. 새들도 짝을 찾기 위해 부지런하게 움직일 때다. 홍매 곁에 있던 이 새 이름은 뭘까? 밀화부리? 집에서 분당을 오갈 때는 버스를 이용하는데 작년부터 전기버스가 하나 둘 눈에 띄기 시작한다. 내연기관 엔진에 비해 진동이나 소음이 적고 좌석도 넓어서 쾌적하다. 우리 동네 길섶에서는 개불알풀꽃과 냉이꽃이 얼굴을 내밀었다. 그저께 살필 때는 없었는데 어제 오늘 사이에 핀 꽃이다. 나로서는 동네에서 작은 풀꽃이 보이기 시작하는 때가 봄의 시작이..

사진속일상 2023.03.06

꽃 향기에 취해도 보고

이맘때 숲에 들면 꽃향기가 가득하다. 벚꽃이나 진달래 꽃잎은 떨어졌지만 향기의 여운은 아직 숲에 배어 있다. 아니면 새싹이 뿜어내는 향기인지 모른다. 나는 궁금해서 새로 돋아난 잎에 코를 바투 대 본다. 순한 뒷산길을 따라 느리게 걸었다. 이런 길을 걸으면 내 마음도 따라서 순해진다. 세상의 각박한 다툼이 사라지는 길이다. 길가에 있는 돌탑에는 지나갔던 사람의 소박한 염원이 담겨 있다. 사는 게 뭐 별 것 있겠는가. 돋아나는 초록잎, 그 사이로 살랑거리며 스치는 바람, 바람 따라 흘러가는 구름, 자연은 그렇게 살아가라고 하지 않는가. 고개를 들고 나무와 나무 사이의 빈 공간을 본다. 나무들은 무슨 신호를 보내면서 타자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 걸까. 숲은 조화의 세계다. 깔개가 있다면 나무 아래 오래 누워..

사진속일상 2022.04.22

아내와 봄길 드라이브

아내와 봄길 드라이브에 나섰다. 우선 벚꽃을 보기 위해 집에서 멀지 않은 남종면의 한강변 벚꽃길로 향했다. 그러나 초입인 분원리로 진입하는 길이 막혔다. 우리 같은 생각을 한 사람이 한둘이 아닌가 보다. 대타로 경안천습지생태공원으로 방향을 돌렸다. 낮 기온이 30도 가까이 올라가는 초여름 날씨였다. 서울은 벚꽃이 지지만 여기는 이제 한창이다. 서울 사람들이 올해의 마지막 벚꽃을 보기 위해 이곳으로 찾아온다. 점심은 천서리에서 막국수로 맛나게 먹었다. 수육을 첨가했다. 외식은 꼭 두 달만이다. 이젠 코로나의 기세가 꺾였으니 조금은 자유롭게 행동해도 될 것 같다. 식당은 평일인데도 사람으로 가득하고 대기표를 뽑아야 했다. 식당 안에서도 술 마시고 떠들며 거침이 없다. 나는 자꾸 몸이 움츠러들었다. 식사 후에..

사진속일상 2022.04.12

성내천 벚꽃(22/4/11)

성내천 벚꽃을 보러 가기 위해 강변역에서 버스를 내려 잠실철교를 따라 난 보도를 걸어서 건넌다. 이쪽 동네는 전에 살았기 때문에 어느 길이나 익숙하고 정겹다. 잠실철교 보도도 자주 건너다닌 길이다. 낮 기온이 25도까지 올랐다. 젊은이들 중에서는 반팔 옷차림도 가끔 눈에 띈다. 20년 전에 성내천 옆에 직장이 있었다. 성내천은 내 출퇴근길이었고, 일과 중에도 시간이 비면 즐겨 산책하던 곳이었다. 그때 벚나무를 심기 시작했는데, "얘들이 언제 커서 제대로 벚꽃 구경을 할까"라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지금은 벚꽃 터널을 이루었다. 벚꽃은 이미 많이 떨어졌고, 나무에는 꽃들 사이로 초록잎이 보인다. 성내천은 올림픽공원과 연결된다. 몽촌정(夢村亭) 주위의 벚꽃이 제일 화사하다.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는 손님이 몇 ..

꽃들의향기 2022.04.11

창경궁의 봄

전 직장 동료들이 창경궁에서 만나자고 했을 때 내심 벚꽃을 구경할 수 있겠다고 좋아했다. 창경원을 창경궁으로 바꾸면서 벚꽃을 없애긴 했으나 춘당지 부근에는 많이 남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불과 이삼 년 전에 춘당지에서 화려한 벚꽃을 본 기억이 있었다. 그러나 직접 가 보니 착각이었다. 창경궁에는 벚나무가 드물 정도로 없다. 춘당지의 기억은 벚꽃이 아니라 가을 단풍이었다. 벚꽃은 귀해도 창경궁의 봄은 따스했다. 열 달만에 만난 동료들의 얼굴도 반가웠다. 나는 사진을 찍는답시고 동선이 다르게 움직였다. 이번에는 봄을 즐기는 사람들을 넣어 보았다. 한 분은 코로나 자가격리 중이라 못 나오고 여섯이 모였다. 다음주에 고향 어머니를 찾아갈 예정이라 나는 점심도 같이 못 하고 헤어졌다. S22 자랑을 하면서 ..

사진속일상 2022.04.09

봄날은 온다

벚꽃을 기준해서 봄의 절정을 삼는다면 중부지방은 봄이 오고 있는 중이다. 아직 새벽 기온은 0도에 이를 정도로 차다. 올해는 예년보다 꽃 피는 시기가 일주일 정도 늦어서 중부지방 벚꽃은 이제 꽃봉오리가 벌어지고 있다. 잠실에 나간 길에 짬을 내 석촌호수에 들렀다. 벚꽃은 성질 급한 몇 그루에서만 보일 뿐이었다. 그래도 휴일이어선지 산책로에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꽃 핀 나무를 힘들게 찾아서 롯데타워를 배경으로 몇 장 찍어 보았다. 둘씩 셋씩 동무해서 나온 젊은이들이 대다수였다. 평일이 되면 산책 나오는 연령대가 달라질지 모른다. 새로 산 휴대폰의 하이퍼랩스를 사용해 보았다. 코로나 시대라서일까, 사람들은 꽃에 더욱 굶주린 것 같다.

꽃들의향기 2022.04.03

그 시절의 상춘

서울에서 6, 70년대 상춘(賞春) 장소는 창경원이 유일했다. 해마다 벚꽃 철이 되면 창경원 앞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밑의 사진 같은 모습은 그나마 질서가 잘 잡힌 것이다. 나는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서울에 올라왔고, 그래서 60년대 후반의 창경원의 봄을 기억한다. 그때 살던 곳이 돈암동이어서 걸어서 창경원까지 갔다. 어느 해 봄에는 시골에 계시는 어머니가 올라오셔서 도시락을 싸가지고 함께 창경원 벚꽃놀이에 간 기억이 난다. 얼마나 상춘객이 많았는지 꽃구경이 아니라 사람 구경이었다. 당시 창경원 안에는 동물원과 놀이기구가 있는 유원지도 있었다. 지금으로 치면 종합 놀이공원이었던 셈이다. 당시 사진을 보면서 옛 추억에 잠겨본다. 청춘남녀들에게는 창경원 밤 벚꽃놀이가 더 인기였다. 아마 나이 지긋하신 분들..

길위의단상 2022.03.30

봄 맞는 뒷산

산 입구에서부터 박새가 맞아준다. 새들의 노랫소리가 겨울철과 달리 맑고 경쾌하다. 산 중턱에서는 어치 네 마리가 나뭇가지에 앉아있다가 소리를 지르며 쏜살같이 날아간다. 어치는 깃털의 고운 색깔과 달리 목소리는 억세다. 어치의 지저귐 역시 활기에 차 있다. 산의 봄은 청각과 촉각으로 온다. 살짝 맺힌 땀을 씻어주는 바람의 느낌이 부드럽다. 시나브로 다가오는 봄이 한결 가까워져 있다. 저쪽에서 연치가 높으신 분이 느린 걸음으로 다가온다. 저분에게도 겨우내 간절히 기다린 봄이었을 것이다. 산길에는 사람의 발을 닮은 나무가 있다. 나무도 걷고 싶은 걸까, 꼭 껴안아준다.

사진속일상 2022.03.09

우수 / 나종영

선암사 해천당 옆에 수백 년 묵은 뒷간 하나 있습니다 거기 쭈그리고 앉아 있으면 문 틈새 이마 위로 나뭇잎 떨어지는 소리 목어(木魚) 흔들어 깨우고 가는 청솔 바람소리 보입니다 부스럭 부스럭 누군가 밑 닦는 소리 들리는데 눈 맑은 동박새가 매화 등걸 우듬지에 앉아 두리번 두리번 뭐라고 짖어댑니다 천년 세월이 덧없이 흘러가고 새로운 천년이 무섭게 밀려오는지 그 울음소리 대숲 하늘 한 폭 찢어놓고 앞산머리 훠이 날아갑니다 하릴없이 대나무 대롱 끝에 입술을 대고 한 모금 찬물을 삼키다가 옳거니 매화꽃 봉오리 움트는 소리 겨울 산그늘 얼음꽃 깨치고 봄 햇살 걸어오는 것 보았습니다 - 우수(雨水) / 나종영 봄은 언제 시작하는 걸까. 문자대로라면 입춘(立春)이 봄의 시작일 텐데 우리나라에서 2월 초순은 봄이라기에..

시읽는기쁨 2022.02.20

갯골생태공원의 봄

부근을 지나다가 시흥에 있는 갯골생태공원에 들렀다. 처음 와보는 곳인 데다 봄꽃의 계절이라 기대가 컸다. 갯골은 갯고랑(갯가의 고랑)의 준말이니 '바닷물이 드나드는 곳에 난 물이 흐르는 도랑'이라는 뜻으로 새긴다. 공원에는 갯골이 여전히 선명하게 보였다. 여기는 옛날에 염전지대가 있었나 보다. 공원 가운데에는 염전 작업을 체험하는 곳도 있다. 원래의 생태 환경을 크게 훼손하지 않으면서 시민을 위한 휴식공간이 잘 되어 있다. 공원에는 벚꽃 가로수길이 있는데 코로나로 통제되고 있다. 길 안쪽은 들어갈 수 없다. 사람이 빽빽이 몰리는 걸 방지하기 위해서다. 그 정도는 사람들이 넉넉히 이해하는 것 같다. 외곽에 자리를 깔고 꽃구경을 즐기는 시민들이 많았다. 공원을 한 바퀴 돌면서 나도 봄을 즐겼다. 벚꽃은 이제..

사진속일상 2021.04.09

경안천습지생태공원의 봄

꽃구경을 하며 경안천습지생태공원을 한 바퀴 돌다. 유치원에서 나들이 나온 아이들이 보이고, 결혼식 기념사진을 찍는 신혼부부도 있다. 이 계절과 잘 어울리는 모습이다. 그러나 코로나 이전에 비해서는 분위기가 식어 있다. 아이들도 마음 놓고 뛰어놀지 못한다. 사진을 찍는 신혼부부도 조심스러워한다. 전이나 후나 봄 풍경은 그대로인데 맘껏 즐길 수 없는 코로나 시대의 봄이다. 말 그대로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다. 꽃구경 하며 돌아다니는 것도 뭔가 죄를 짓는 것 같다. 4차 대유행을 예견하는 어두운 보도가 뉴스에서 나온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갈지, 착잡한 2021년의 봄이다.

사진속일상 2021.04.07

소문이 돌다 / 정윤옥

복사꽃 활짝 핀 솔이네 집에 든 좀도둑 애지중지 보살펴온 난 몇 개 손 탔다 적금 부을 십오만 원은 손도 대지 않았다는데 그 별난 손님 베란다 화분들만 마구 헤집어놨다지 며칠 전 나도 시어골 골짝 몰래 들어가 고추순, 오이순, 다래순에 달래까지 사정없이 캐고 뜯고 훑어왔었는데 그 손님 꽃 도둑이면 난 영락없는 봄 도둑이네 - 소문이 돌다 / 정윤옥 그렇다면 나 역시 이 화려한 봄날의 활동사진을 공짜로 구경하는 도둑놈이 아닌가. 모델료를 내지 않고도 예쁜 꽃을 마음대로 찍는다. 멋진 자태의 홍매와 데이트를 하며 희희낙락한들 희롱죄로 고소 당하지도 않는다. 공으로 남의 것을 누리면서 뭘 더 바란단 말인가. 그런데 이 요염한 봄의 유혹에 누군들 좀도둑이 되지 않으리. 하느님도 슬며시 미소를 띠며 바라보실 것 ..

시읽는기쁨 2021.03.20

우리 동네에도 찾아온 봄

멀리서 전해오는 꽃소식만 들었는데 드디어 우리 동네에도 봄이 찾아왔다. 여기는 서울보다 위도가 낮지만 기온은 이삼 도 정도 낮은 지역이다. 봄이 늦게 찾아온다. 며칠 만에 밖에 나섰더니 집 주변은 꽃들로 환하다. 언제 이렇게 폭발하듯 나타났는지 신기하다. 봄까치꽃, 제비꽃, 산수유, 매화, 민들레를 같은 장소에서 한꺼번에 만났다. 봄까치꽃의 원래 이름은 개불알풀이다. 이름이 민망하다고 봄까치꽃으로 부른다. 전해지는 이름에는 나름의 이유와 정서가 녹아 있는데 쉽게 바꾸는 데 동의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개불알풀은 일본명을 직역한 것이라 변경해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동무들아 오너라 봄맞이 가자 너도나도 바구니 옆에 끼고서 달래 냉이 씀바귀 나물 캐오자 동무들아 오너라 봄맞이 가자 시냇가에 앉아서 다리도 쉬고 ..

꽃들의향기 2021.03.14

2020 한택식물원의 봄

손주를 데리고 한택식물원에 갔다. 바람이 몹시 불어서 표를 끊을까 말까 고민을 했지만, 한 시간이나 달려온 시간이 아까워 그냥 들어가기로 했다. 거센 바람에도 불구하고 풍성한 꽃잔치에 흥겨웠다. 다양한 꽃들이 있었지만 이번에는 튤립이 제일 눈에 들어왔다. 튤립은 주변 환경과 잘 어울리는 꽃인 것 같다. 적으면 적은대로 많으면 많은대로 제 잘 난 척 튀지 않으면서 주위 풍경과 조화를 이룬다. 내가 꽃사진 찍는 게 부러웠는지 이번에는 저도 카메라를 들고 왔다. 사진을 찍고나서는 화면을 보여주며 자랑하느라 바쁘다. 사실 자세랑 결과물이랑 별로 나무랄 데 없다. 한택에 있는 내내 꽃에 관심을 보이고 집중하는 손주가 기특하다. 할아버지와 할머니 한테 귀여움 받기 위해서 하는 행동이라 이해하지만, 그렇더라도 아직 ..

사진속일상 2020.04.25

초록 바람의 전언 / 고재종

뒷동산 청솔잎을 빗질해 주던 바람이 무어라 무어라 하는 솔나무의 속삭임을 듣고 푸른 햇살 요동치는 강변으로 달려갔다 하자. 달려가선, 거기 미루나무에게 전하니 알았다 알았다는 듯 나무는 잎새를 흔들어 강물 위에 짤랑짤랑 구슬 알을 쏟아 냈다 하자. 그 의중 알아챈 바람이 이젠 그 누구보단 앞들 보리밭에서 물결치듯 김을 매다 이마의 구슬땀 씻어 올리는 여인에게 전하니, 여인이야 이윽고 아픈 허리를 곧게 펴곤 눈앞 가득 일어서는 마을의 정자나무를 향해 고개를 끄덕끄덕, 무언가 일별을 보냈다 하자. 아무려면 어떤가, 산과 강과 들과 마을이 한 초록으로 짙어 가는 오월도 청청한 날에, 소쩍새는 또 바람결에 제 한 목청 다 싣는 날에. - 초록 바람의 전언 / 고재종 요사이 표현대로 하면 '초록초록'하고 '방실방..

시읽는기쁨 2019.05.30

화양연화 / 김사인

모든 좋은 날들은 흘러가는 것 잃어버린 주홍 머리핀처럼 저녁 바다처럼. 좋은 날들은 손가락 사이로 모래알처럼 새나가지 덧없다는 말처럼 덧없이, 속절없다는 말처럼이나 속절없이. 수염은 희끗해지고 짖궂은 시간은 눈가에 내려앉아 잡아당기지. 어느덧 모든 유리창엔 먼지가 앉지 흐릿해지지. 어디서 끈을 놓친 것일까. 아무도 우리를 맞당겨주지 않지 어느날부터. 누구도 빛나는 눈으로 바라봐주지 않지. 눈멀고 귀먹은 시간이 곧 오리니 겨울 숲처럼 더는 아무것도 애닯지 않은 시간이 다가오리니 잘 가렴 눈물겨운 날들아. 작은 우산 속 어깨를 겯고 꽃장화 탕탕 물 장난 치며 슬픔 없는 나라로 너희는 가서 철모르는 오누인 듯 살아가거라. 아무도 모르게 살아가거라. - 화양연화(花樣年華) / 김사인 김사인 시인이 노래하는 '봄..

시읽는기쁨 2019.05.07

봄 물드는 뒷산

산벚꽃 사이로 봄 산은 연초록 새 옷을 갈아입는 중이다. 매년 맞이하지만 봄은 늘 새롭고 경이롭다. 올해의 봄은 작년의 봄과 다르다. 같은 색깔, 같은 모습으로 찾아오지만 우리가 봄을 보는 눈은 같지 않다. 봄과 봄 사이의 인간사 사연들이 투영된 마음의 프리즘으로 우리는 봄을 맞이한다. '절망의 의지'를 너무 들여다보지 말고, 지상이 표상하는 생명의 약동에 한눈팔아도 괜찮은 봄이다. 잘려나간 나무줄기에서도 생명은 돋아난다. 멀리 산골 동네서 개 짖는 소리도 포근하다. 연초록 새잎이 꽃보다 더 예쁘다. 봄 물드는 뒷산을 한 바퀴 돌았다.

사진속일상 2019.04.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