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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의 기념사진

서울 선유도공원에서 옛 동료와.... 안동 하회마을에서 어머니와.... 들로 산으로 씩씩하게 다니신다는 어머니가 평지길에서는 힘들어 하신다. 어디 놀러가자고 했을 때 자꾸 사양하신 이유를 알 것 같다. 당신의 약한 모습을 자식에게 숨기고 싶으셨을 게다. 노약해가는 부모님 모습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고향 밭에서, 일은 하지 않고 폼만 쟀을 뿐....

사진속일상 2013.05.04

비실대는 봄

시절이 수상해서 그런지 올해처럼 변덕스런 봄도 없다. 4월 중순까지 눈이 내리더니 바람도 여느 때보다 심하고 따스한 봄이라는 느낌이 별로 없다. 덩달아 나도 봄앓이를 심하게 하고 있다. 허리가 아픈지도 꼭 한 달이 되었다. 이제 95%는 정상으로 돌아왔다. 허리를 굽혀 양말을 신을 수 있게 된 것만도 감사하다. 그래도 하루에 1mm씩이나마 조금씩 허리가 제대로 작동하는 것을 지켜보는 건 기뻤다. 일부러 병원에는 가지 않았다. 시간은 더 걸릴지라도 저절로 낫게 되는 걸 믿었기 때문이다. 하긴 백수가 급할 것도 없다. 그 와중에도 꽃 갈증을 못 이겨 서울대공원으로 호암미술관으로 나들이 다녔더니 몸살이 찾아왔다. 두 손님 다 이제야 슬슬 떠날 채비를 하고 있다. 오늘은 텃밭 농장의 '팜 커밍 데이'(Farm ..

사진속일상 2013.04.28

긴 질문에 대한 짧은 대답 / 이화은

밤새워 비 내리고 아침 둥굴레순 그 오래 묵은 새촉이 불쑥 뛰쳐 나왔습니다 올봄도 온 우주의 대답이 이렇듯 간단명료 합니다 - 긴 질문에 대한 짧은 대답 / 이화은 밤새 친구들과 통음하며 세상의 불의에 대해 울분을 토하고 절망한 뒤 밖에 나선 새벽, 깜깜한 밤하늘에 별 하나가 반짝이며 나를 내려다 보고 있었습니다....

시읽는기쁨 2013.04.16

장난감 디카로 찍어본 봄꽃

얼마 전에 값싼 디카를 하나 샀다. 하이마트에 갔더니 10만 원짜리 카메라가 있는 것이었다. 가격으로 치면 딱 장난감 수준인데, 사진은 과연 어떻게 나올까 궁금해서 재미로 갖고 와 보았다. 카메라는 손에 들었는지도 모르게 작고 가볍다. 기능도 아주 단순하다. 기대를 한 건 아니지만 우선 찍힌 사진을 보니 색깔이 너무 칙칙하다. 채도 조절을 해 보지만 한계가 있다. 그리고 초점 잡는데 너무 헤맨다. 꽃 같은 접사는 여간 힘든 게 아니다. 또, 사진 저장하는데도 시간이 오래 걸린다. 성질 급한 사람은 열 받게 생겼다. 렌즈 탓이겠지만 사진의 선예도도 많이 떨어진다. 하여튼 나에게는 재미있는 카메라다. 그러려니 하고 찍으면 사용 못 할 것도 없다. 사진의 질을 따지지 않는다면 넉넉히 쓸 수 있다. 앞으로 외출..

꽃들의향기 2013.04.08

출석 부른다 / 이태선

1번 한우람 정다혜 2번 동사무소 앞 황매화 3번 경비실 옆 철쭉 4번 반지하 방 창문 얼룩 폭우 그친 이튿날 북한산 밑 쌍문1동 교실 반짝반짝 햇빛 선생님 출석 부른다 덥수룩한 어둑발이 쳐들어온다 마루 끝에 앉은 아버지 신을 벗어 턴다 소가 울지 않는다 옆집 도마질 소리 수돗가 펌프 소리 미지근한 수돗물 낮은 부뚜막 하수 냄새 외가의 쪽마루 고양이, 청승 맞게 울던 서울 냄새 멀미 노란 눈 속으로 고요히 골목 연탄 냄새 네 네 네 깊게 깊게 맑은 폭우 그친 다음 날 한우람 정다혜 뜸부기 소쩍새 세상 만물 대답한다 반짝 반짝 담벼락의 벽보도 내 마음의 얼룩도 - 출석 부른다 / 이태선 지난 주말에는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불고 봄 심술이 심했다. 오늘 아침은 햇빛 선생님 환한 얼굴로 출석부를 들고 들어오신다..

시읽는기쁨 2013.04.08

냉이의 꽃말 / 김승해

언땅 뚫고 나온 냉이로 된장 풀어 국 끓인 날 삼동 끝 흙빛 풀어진 국물에는 풋것의 향기가 떠 있는데 모든 것 당신에게 바친다는 냉이의 꽃말에 찬 없이도 환해지는 밥상머리 국그릇에 둘러 피는 냉이의 꽃말은 허기진 지아비 앞에 더 떠서 밀어놓는 한 그릇 국 같아서 국 끓는 저녁마다 봄, 땅심이 선다 퍼주고도 다시 우러나는 국물 같은 냉이의 꽃말에 바람도 슬쩍 비켜가는 들, 온 들에 냉이가 돋아야 봄이다 봄이라도 냉이가 물어 주는 밥상머리 안부를 듣고서야 온전히 봄이다 냉이꽃, 환한 꽃말이 밥상머리에 돋았다 - 냉이의 꽃말 / 김승해 이 시를 읽고 시장에서 냉이를 사와 국을 끓였다. 시장에서 사온 봄은 비닐봉지 속에 깔끔하게 손질되어 있었다. 그래선지 냉이의 향기가 조금은 허전했다. 따스한 햇볕 아래 호미를..

시읽는기쁨 2012.03.25

봄의 소식 / 신동엽

마을 사람들은 되나 안되나 쑥덕거렸다. 봄은 발병 났다커니 봄은 위독(危毒)하다커니 눈이 휘둥그래진 수소문에 의하면 봄이 머언 바닷가에 갓 상륙해서 동백꽃 산모퉁이에 잠시 쉬고 있는 중이라는 말도 있었다. 그렇지만 봄은 맞아 죽었다는 말도 있었다. 광증(狂症)이 난 악한한테 몽둥이 맞고 선지피 흘리며 거꾸러지더라는..... 마을 사람들은 되나 안되나 쑥덕거렸다. 봄은 자살했다커니 봄은 장사지내 버렸다커니 그렇지만 눈이 휘둥그래진 새 수소문에 의하면 봄은 뒷동산 바위 밑에, 마을 앞 개울 근처에, 그리고 누구네 집 울타리 밑에도, 몇 날 밤 우리들 모르는 새에 이미 숨어와서 몸 단장(丹裝)들을 하고 있는 중이라는 말도 있었다. - 봄의 소식(消息) / 신동엽 봄이 봄 같지 않다. 일조량 부족에 냉해, 거기..

시읽는기쁨 2010.04.28

서울대공원에서 봄향기에 취하다

아내와 함께 가까운 서울대공원으로 나들이를 나갔다. 멀리 가지 않고도 봄 정취를 즐기기에 이만한 곳도 없다. 예년에 비해 개화 시기가 늦어서 벚꽃도 아직 볼 만했다. 오랜만에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에 화창한 봄날이었다. 꽃보다도 더 예쁜 것이 수채화 물감으로 그린 듯한 봄산의 모습이다. 이제 막 돋아나기 시작하는 숲의 나뭇잎들이 만드는 색감은 그 얼마나 귀여운가. 꼬옥 깨물어주고 싶다. 마침 식물원에서 봄꽃 페스티발을 하고 있었다. 재미있는 꽃장식들이 눈길을 끌었다. 국립현대미술관에 들렀는데 건물 중앙에 새로 전시된 작품이 눈길을 끌었다. 밤나무를 소재로 해서 저렇게 완벽한 구형의 고리를 만들었다. 거친 나무가 마치 실크와 같은 부드러운 느낌으로 변했다. 참 재미있는 작품이다. 그런데 작품 제목이 ..

사진속일상 2010.04.25

연초록에 젖다

유리창 밖으로 잠시 봄햇살이 환하다. 아침에는 비까지 뿌렸고 아직도 먹구름이 군데군데 하늘을 덮고 있다. 숨바꼭질 하듯 간간이 얼굴을 내미는 햇님이 그래서 더 반갑고 눈부시다. "아, 이런 날은 교실에서 벗어나고 싶다." "저두요. 저두요." 얌전히 앉아 있던 이쁜이들이 혼잣말을 알아듣고는 개구리들처럼 한 목소리다. 컴퓨터를 닫고 일찍 사무실을 나선다. 이럴 때는 옆에 한강이 있다는 게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몸도 마음도 상쾌해진다. 윤중로에는 벚꽃비가 내린다. 바람이 꽃비를 소나기처럼 날리게 한다. 연초록을 찾아 샛강으로 내려간다. 꽃보다 더 고운 것이 지금의 나뭇잎 색깔이다. 눈물이 날 정도로 귀엽고 이쁘고 아기자기하다. 젖 비린내 나는 뺨을 깨물어주고 싶고, 꼭 껴안고 잠들고 싶어진다. 두 시간 ..

사진속일상 2010.04.24

무언으로 오는 봄 / 박재삼

뭐라고 말을 한다는 것은 천지신명께 쑥스럽지 않느냐 참된 것은 그저 묵묵히 있을 뿐 호들갑이라고는 전연 없네 말을 잘함으로써 우선은 그럴싸해 보이지만 그 무지무지한 추위를 넘기고 사방에 봄빛이 깔리고 있는데 할 말이 가장 많은 듯한 그것을 그냥 눈부시게 아름답게만 치르는 이 엄청난 비밀을 곰곰이 느껴보게나 - 무언(無言)으로 오는 봄 / 박재삼 시끄럽고 어수선한 세상이지만 그래도 봄은 왔다. 말없이 묵묵히 가까이 왔다. 집 뒤 응달의 개나리도 봄물이 들기 시작했다. 가지에 찍힌 노란 점들이 애틋하고 눈물겹다. 널 보면 왜 자꾸 한숨이 나오는지..... 심신이 지쳐가던 이때에 다행히 며칠간의 자유시간이 주어졌다. 내일부터는 봄을 만나러 가까운 산에라도 들어가봐야겠다. 온갖 소음으로 들끓는 내 마음도 조금은..

시읽는기쁨 2010.04.06

고창 청보리밭과 미소사

친척 문상을 간 길에 하루 시간을 내어 고창에 들렀다. 이번에는 선운사를 생략하고 학원농장의 청보리밭과 미소사를 찾아 보았다. 보리밭도 이젠 관광상품이 되었다.이곳 학원농장(鶴苑農場)은 17만 평의 넓은 야산자락이 봄이면 보리, 가을이면 메밀로뒤덮인다. 이국적이라고 할까, 끝없이 펼쳐진 초록의 물결이 장관이었다. 지금 보리는 약 한 뼘 정도 자라 있다. 아직 때가 일러서인지 찾는 사람은 드문드문했다. 미소사(微笑寺), 이름이 예뻐서 일부러 찾아갔다. 절집의 분위기는 거기에 계시는 스님에 따라 확연히 달라진다. 미소사는 작고 아담한 절인데 따스하고 인간적이라는 느낌을 받았다.엄숙하고 묵직한 종교의 냄새가 덜 났다. 차에서 내리니 조용하던 절에 인기척을 느끼셨는지 한 분이 합장을 하며 맞으신다. 스님은 출타..

사진속일상 2010.04.04

해마다 봄이 되면 / 조병화

해마다 봄이 되면 어린 시절 그분의 말씀 항상 봄처럼 부지런해라 땅속에서, 땅 위에서 공중에서 생명을 만드는 쉬임 없는 작업 지금 내가 어린 벗에게 다시 하는 말이 항상 봄처럼 부지런해라 해마다 봄이 되면 어린 시절 그분의 말씀 항상 봄처럼 꿈을 지녀라 보이는 곳에서 보이지 않는 곳에서 생명을 생명답게 키우는 꿈 봄은 피어나는 가슴 지금 내가 어린 벗에게 다시 하는 말이 항상 봄처럼 꿈을 지녀라 오, 해마다 봄이 되면 어린 시절 그분의 말씀 항상 봄처럼 새로워라 나뭇가지에서, 물 위에서, 뚝에서 솟은 대지의 눈 지금 내가 어린 벗에게 다시 하는 말이 항상 봄처럼 새로워라 - 해마다 봄이 되면 / 조병화 어느 자리에선가 미당 얘기가 나왔을 때, 국어 선생님이신 S 형이 이런 얘기를 해 주었다. S 형은 미..

시읽는기쁨 2010.03.25

꽃말 하나를 / 이시하

봄이 오면 작은 화단에 이름 모를 꽃들이나 심어야지. 그리고선 내 맘대로 순이, 덕이, 점례, 끝순이 같은 이름이나 지어 줘야지. 지친 저녁달이 마른 감나무에 걸터앉아 졸 즈음엔 이름이나 한 번씩 불러 봐야지. 촌스러워, 촌스러워, 고개를 흔들어도 흠, 흠, 모른 척 해야지. 그래놓고 나 혼자만 간절한 꽃말 하나 품어야지 당신 모르게, 당신은 정말 모르게 - 꽃말 하나를 / 이시하 봄은 거저 오는 것이 아니라 나아가 맞는 것이다. 각자 자신만의 꽃말 하나씩을 가지고.... 세상이 험하다고 상춘곡을 부르지 못하랴. 화단에는 노랑나비가 춤을 추게 할 테야. 살랑거리는 봄바람에 취해서 흔들릴거야. 당신 모르게, 당신은 정말 모르게.

시읽는기쁨 2010.03.13

전율

휴가 후유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일요일 하루만 쉬어도 월요병이 생기는데 두 달간이나 놀았으니 몸과 마음이 온전할 리가 없다. 내가 나를 보아도 안스럽기만 하다. 답답해서 사무실을 나와 산책하다가 한 순간 화단에 눈이 멎었다. 놀랍게도 초록잎들이 땅을 덮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꽃도 피어 있는 게 아닌가. 별꽃이었다. 전율! 가슴이 방망이질 쳤다. 어느새 봄이 이렇게 가까이 왔단 말인가. 어제 내린 봄비가 기적을 만들었는지 모른다. 그동안 나에게만 갇혀 세상을 보지 못했다. 봄이 오는 소리에도 귀를 막았다. 동토를 견디고 새싹을 내미는 저 생명의 에너지를 보라. 부끄럽고 감사하다. 자의식의 껍질을 깨고 네 마음의 문을 열어라. 우주의 기운이 네 안으로 흐르게 하라. 봄이 오고 있다. 떨리는 가슴으로..

사진속일상 2010.03.05

저 못된 것들 / 이재무

저 환장하게 빛나는 햇살 나를 꼬드기네 어깨에 둘러맨 가방 그만 내려놓고 오는 차 아무거나 잡아타라네 저 도화지처럼 푸르고 하얗고 높은 하늘 나를 충동질하네 멀쩡한 아내 버리고 젊은 새 여자 얻어 살림을 차려보라네 저 못된 것들 좀 보소 흐르는 냇물 시켜 가지 밖으로 얼굴 내민 연초록 시켜 지갑 속 명함을 버리라네 기어이 문제아가 되라 하네 - 저 못된 것들 / 이재무 그래, 모든 게 저 못된 것들 때문이야. 배낭 둘러매고 이 산 저 산 헤매이게 하는 것이며, 몇 잔 술에 취해 집에 가기 싫다고 투정을 부리게 되는 것이며, 기어이 눈물을 보이게 하는 철없는 짓이며, 모든 게 저 못된 것들 탓이야. 그러나 이 환장할 봄날에 잠시 문제아가 되어 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봄의 유혹에 모른 척 빠져보는 것도 ..

시읽는기쁨 2009.05.06

천마산의 봄

봄꽃을 보러 천마산에 갔다. 청량리에서 165번 버스를 타니 종점이 호평동 천마산 입구였다.1 시간 정도가 걸렸다. 봄꽃철이 지나선지 산 아래에서는 거의 꽃을 볼 수 없었다. 꽃보다는 봄의 산색이 아름다웠다. 천마의 집 옆의 가파른 능선을 따라 먼저 정상에 올랐다. 이곳에서도 역시 노랑제비꽃이자주 눈에 띄었다. 돌핀샘 주위에서많은 꽃들을 만났다. 미치광이풀이 제일 흔했다. 오랜만에 점현호색을 보고, 또 는쟁이냉이를 확인한 것은 가장 큰 소득이었다. 그러나 대부분이 꽃들이 절정을 지나 이미 시들기 시작하고 있었다. 꽃대장이 몸살로 불참했는데 대신 M의 꽃지식 덕을 톡톡히 보았다. M은 잎으로도 식물 이름을 잘 알아맞췄다. 크게 자란 노루귀 잎도 이번에 처음 보았다. 팔현계곡을 따라 내려가 오남리에서 202..

꽃들의향기 2009.05.06

연인산의 봄

히말라야 파트너였던 J와 연인산(戀人山 1068 m, 경기 가평)에 가기 위해 청량리역에서 7 시 50 분 발 춘천행 기차를 탔다. 이번 길은 J의 제의로 갑자기 성사된 번개산행이었다. 좌석은 매진되고 입석표밖에 없었지만 오랜만에 타보는 경춘선 열차라 서서 가도 기분이 좋았다. 우리 둘은 열차 출입구에 서서 바깥 경치를 구경하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맞은 편에서는 젊은 연인 둘이 아무 말도 없이 꼭 껴안고 있었다. 청량리에서 가평까지 가는데 1 시간 20 분이 걸렸다. 버스터미널로 가다가 작년에 퇴직하신 C 선생님을 우연히 만났다. 그래서 그분의 차로 등산 기점인 백둔리까지 손쉽게 갈 수 있었다. C 선생님은 야생화 사진을 찍으러서울에서 내려오시던 길이었다. 산행은 백둔리에서 시작하여 취수장 옆 작..

꽃들의향기 2009.05.04

대책 없는 봄 / 임영조

무엇이나 오래 들면 무겁겠지요 앞뜰의 목련이 애써 켜든 연등을 간밤엔 죄다 땅바닥에 던졌더군요 고작 사나흘 들고도 지루했던지 파업하듯 일제히 손을 털었더군요 막상 손 털고 나니 심심했던지 가늘고 긴 팔을 높이 뻗어서 저런! 하느님의 괴춤을 냅다 잡아챕니다 파랗게 질려 난처하신 하느님 나는 터지려는 웃음을 꾹 참았지만 마을 온통 웃음소리 낭자합니다 들불 같은 소문까지 세상에 번져 바야흐로 낯 뜨거운 시절입니다 누구 짓일까, 거명해서 무엇하지만 맨 처음 발설한 것은 매화년이고 진달래 복숭아꽃 살구꽃이 덩달아 희희낙낙 나불댄 게 아니겠어요 싹수 노란 민들레가 망보는 뒤꼍 자꾸만 수상쩍어 가보니 이런! 겁없이 멋대로 발랑까진 십대들 냉이 꽃다지 제비꽃 환하더군요 몰래 숨어 꼬나문 담뱃불처럼 참 발칙하고 앙증맞은..

시읽는기쁨 2009.04.09

봄을 만져 보세요

"자, 이리 와서 봄을 만져 보세요." 선유도공원에 맹인들이 봉사자의 손을 잡고 봄나들이를 나왔다. 봉사자들이 살구나무 앞에서 꽃의 감촉과 향기를 느끼도록 도와주고 계신다. 맹인들은 꽃잎을 만져보고 미소를 띠며 즐거워한다. 햇살 따스한 봄날 오후였다. 그런데 서울 지방의 오늘 낮 기온이 22.2 도로 3 월의 기온으로는 89 년만의 기록이란다. 한강 둔치에서 산보하는 사람들도 반팔 차림이 심심찮게 눈에 띤다. 나도 겉옷을 모두 벗어야 했다. 이젠 너무 자주 새로운 기록을 갱신하는 고온현상이 두렵다. 한강변을 걸으며 여러 꽃들을 만났다. 매화, 홍매, 살구꽃, 개나리, 진달래, 제비꽃, 개불알풀, 냉이, 산수유, 생강나무꽃 등 어느 순간에 봄은 우리 곁에 왔다. 원래 봄이 오는 속도는 느린 걸음 정도인 시..

사진속일상 2009.03.21

윤사월 / 박목월

송화가루 날리는 외딴 봉우리 윤사월 해 길다 꾀꼬리 울면 산지기 외딴 집 눈먼 처녀사 문설주에 귀 대고 엿듣고 있다 - 윤사월 / 박목월 아마 이맘 때였을 것이다. 동두천 산골에서 군대생활을 할 때였는데 창문을 열어놓은 사무실 책상 위에는 한두 시간만 지나면 노랗게 송화가루가 쌓였다. 그 연노란 병아리 색깔의 송화가루가 고단했던 군대생활과 대비되어 무척 슬프게 보였던 기억이 난다. 그때도 아마 이 시가 떠올랐을 것이다. 군대 막사가 아니었더라면 무척 낭만적인 풍경이었다. '눈먼 처녀'에서 눈이 멀었다는 것과 처녀라는 것은 인간의 순수성을 표상하는 의미가 아닐까. 세상에 대하여 눈이 멀고, 욕망의 때가 묻지 않은 순수한 인간은 존재 자체가 자연의 일부분이다. 이 시는 적막한 봄날의 슬픈 풍경이 아니라 인간..

시읽는기쁨 2008.05.08

도화 아래 잠들다 / 김선우

동쪽 바다 가는 길 도화 만발했길래 과수원에 들어 색(色)을 탐했네 온 마음 모아 색을 쓰는 도화 어여쁘니 요절을 꿈꾸던 내 청춘이 갔음을 아네 가담하지 않아도 무거워지는 죄가 있다는 것은 얼마나 온당한가 이 봄에도이 별엔 분분한 포화, 바람에 실려 송화처럼 진창을 떠다니고 나는 바다로 가는 길을 물으며 길을 잃고 싶었으나 절정을 향한 꽃들의 노동, 이토록 무욕한 꽃의 투쟁이 안으로 닫아건 내 상처를 짓무르게 하였네 전 생애을 걸고 끝끝내 아름다움을 욕망한 늙은 복숭아나무 기어이 피워낸 몇 날 도화 아래 묘혈을 파고 눕네 사모하던 이의 말씀을 단 한 번 대면하기 위해 일생토록 나무 없는 사막에 물 뿌린 이도 있었으니 내 온몸의 구덩이로 떨어지는 꽃잎 받으며 그대여 내 상처는 아무래도 덧나야겠네 덧나서 물..

시읽는기쁨 2008.04.30

어느 봄날 오후

어느새 봄은 우리들 가운데로 들어왔다. 한낮에는 양복이 답답할 정도로 기온도 올라갔다. 이곳저곳에서 꽃 축제가 한창이다. 우리 동네로 들어오는 작은 길에서도 벚꽃 축제가 열렸다. 바야흐로 축제의 계절이다. 얼굴을 간지리는 따스한 햇살, 움터 나오는 연초록의 나뭇잎들, 봄기운에 들뜬 당신의 마음 속에 봄은 들어있다. 일찍 퇴근하며 걸어서 광화문을 거쳐 시청 앞까지 걸었다. 운동장에 서면 옆의 산이 막 부르는 듯 하다고, 그래서 오늘은 인왕산을 넘어서 집으로 가겠다고 하던 동료도 지금은 산길을 걷고 있을 것이다. 말 없이 꽃잎을 건네주던 동료도 지금은 꽃길을 찾아 걷고 있을지 모른다. 하는 일 없이 사무실에 남아 있기에는 봄날의 오후는 너무나 설렌다. 시청 앞에는 분수가 물을 뿜어올리고, 철없는 아이들은 벌..

사진속일상 2008.04.11

개나리 / 송기원

어디엔가 숨어 너도 앓고 있겠지 사방 가득 어지러운 목숨들이 밤새워 노랗게 터쳐나는데 독종(毒種)의 너라도 차마 버틸 수는 없겠지 - 개나리 / 송기원 동료 K가 전 직원에게 이런 꽃시 메신저를 보냈다. '4월입니다. 꽃시 한 편 읽으시며 여유를 되찾으시기를 바랍니다.'라는 멘트와 함께... 이 봄, 독종들조차 버틸 수 없게 터져나오는 생명의 에너지를 위하여 건배!!....

시읽는기쁨 2008.04.02

다시 새싹이 나오다

하늘에 가까운 이곳 베란다로 쏟아져 들어오는햇빛이 좋다. 그 햇빛이 아깝다며 아내가 화분에 뿌린 상추씨에서 싹이 나왔다. 사람한테는 무언가를 심고 가꾸고 싶어하는 본능이 있다. 나는 이것을 경작본능이라고 부르고 싶다. 저 상추의 새싹을 보니 아득한 슬픔 같은 것이 몰려온다. 지난 5년 간 우리는 우리의 터에다 온갖 작물을 길러보는 실험을 했다. 우리가 이름을 알고 있는 대부분의 작물을 아마 길러 보았을 것이다. 그래서 매 주말이면 흙과 함께 생활했는데, 이제 터는 떠나가고 아파트 베란다 좁은 한쪽 구석의 화분에 저렇게 초록의 흔적만이 남게 되었다. 그때 아내는 힘들다 힘들다 하면서도 밭에 나가 일을 할 때 행복해 했었다. 고향 어머님을 뵈러 출발했다가 차들이 밀려 되돌아왔다. 이곳으로 이사온 후 서울을 ..

사진속일상 2007.05.05

동작봉의 봄

따스한 봄햇살은 사람을 가만 놔두지 않는다. 집안에만 들어앉아 있으면 뭔가 죄를 짓는 것 같다. 시선은 자꾸 창 밖을 향하고 부산해진 마음은 운동화를 찾아내어 밖으로 나서게 만든다. 꽃잔치가 벌어지는 유명한 곳이 아니어도 괜찮다. 자신의 집 주변에서 봄의 향기를 맡을 수 있다면 더욱 좋을 것이다. 아내와 같이 뒷산을 올랐다. 국립묘지를 끼고 있는 이 산을 동작봉이라고 부르는 것 같다. 작지만 여러 개의 봉우리가 연결된 능선을 따라 걷는 재미가 아기자기한 재미있는 산이다. 묘지의 출입을 막는 흉물스런 시멘트 담벽이 거슬리지만 세 곳에 묘지와 연결통로가 있어 그나마 다행이다. 벚꽃은 한창 때를 지났지만 그래도 아직은 볼 만하다. 장군묘역에서 삼면으로 바라보이는 산에는 하얀 벚꽃이 점점이 박혀 있다. 여기가 ..

사진속일상 2007.04.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