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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은 스캔들이다 / 최형심

목련, 바람이 났다 알리바이를 캐내려는 흥신소 사내가 분주하다 흰 복대로 동여맨 두툼한 허리가 어딘지 수상하다 하루가 다르게 치마폭이 부풀어 오른다 여기저기 나뭇잎들이 쑥덕쑥덕거린다 하룻밤 사이에 소문이 온 개봉동에 다 퍼졌다 소문에 시달리던 목련, 나는 아무 죄가 없다고 몸을 활짝 열어젖힌다 봄이 뜨겁다 - 봄은 스캔들이다 / 최형심 연분홍 진달래는 염문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뜨거운 소문이 온 산을 불태울 듯하다. 빨간 명자꽃은 요염하고 정열적이다. 화사하게 차려입은 벚꽃은 바람둥이처럼 흩날린다. 노란 개나리는 순진한 풋사랑이다. 목련은 어느새 아기를 뱄나 보다.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는 옛말이 맞다고 모두가 쑥덕거린다. 그렇다, 봄은 스캔들로 시끌벅적하다.

시읽는기쁨 2019.04.14

탄천의 봄

치과 진료차 야탑에 나간 길에 탄천에 나가보았다. 분당을 관통하는 탄천은 자연을 즐기면서 운동과 휴식을 할 수 있는 도시 속 아름다운 공간이다. 벚나무가 많이 식재되어 있어 봄이면 꽃잔치가 벌어진다. 지금 벚꽃과 개나리를 비롯한 봄꽃이 한창이다. 야탑에서 천변을 따라 수내동 중앙공원까지 꽃 구경하며 천천히 걸었다. 두 시간 정도 걸렸다. 집에 와서는 유치원에서 돌아온 손주를 맞아 경안천습지생태공원으로 나갔다. 제 어미가 독감에 걸려 사흘째 우리 집에서 지내고 있다. 생태공원은 오래된 나무 데크 보수하느라 내부는 출입이 통제되고 둑길만 열려 있다. 아이는 외할머니 따라 쑥 캐는데 빠졌다. 식물과 동물에 대한 호기심이 남다르다.

사진속일상 2019.04.13

성내천 벚꽃

서울은 지금 벚꽃이 한창이다. 서울의 대표적인 벚꽃 명소인 여의도와 석촌호수에서는 이번 주에 벚꽃 축제가 열리고 있다. 원래는 여의도에 가려고 했으나 지나는 길에 성내천 벚꽃이 보여 방향을 틀었다. 20년 전에 성내천 부근 직장에서 근무한 적이 있다. 중간에 비는 시간이 생기면 나와서 성내천 둑을 자주 걸었다. 그때는 벚나무를 심은지 얼마 되지 않았다. 봄이 되어도 꽃이 얼마 피지 않았다. 10년만 지나면 벚꽃 터널이 될 거라 생각했는데 예상대로 되었다. 이곳 성내천 벚나무는 30년생쯤 될 것이다. 훌쩍 자란 벚나무 길을 걸으며 옛날 생각이 많이 났다. 석촌호수에 간 첫째가 보내준 사진에는 꽃길이 사람들로 가득했다. 여기는 상대적으로 한산한 편이다. 점심시간에는 현대아산병원 직원들이 몰려나와 잠깐 북적였..

꽃들의향기 2019.04.08

봄 맞는 뒷산

어제는 한 시간 정도 진눈깨비가 흩날렸다. 지붕과 산이 하얀 옷을 입었다가 금방 제 모습으로 돌아왔다. 덕분에 오늘 산길은 촉촉하게 젖어 걷기에 좋았다. 남쪽 지방은 벚꽃이 한창이지만 여기는 이제 봄기운이 도착했다. 진달래가 꽃봉오리를 맺은 채 따스한 햇볕을 기다리고 있다. 이제 며칠 뒤면 활짝 필 것이다. 뒷산에는 생강나무꽃이 한창이다. 지금부터 폭죽 터지듯 봄꽃의 향연이 펼쳐지리라. 올해는 개화 시기가 일주일 정도 빠르다. 각 지방의 꽃 축제도 예년보다 앞당겨지는가 보다. 뒷산 꼭대기에 이를 때쯤 조그만 쉼터가 나온다. 대여섯 사람이 앉을 만한 평지다. 남향이어서 햇살 따스하고 뒤로는 산이 둘러싸고 있어 포근하다. 나무를 가로로 걸쳐놓은 의자가 있고, 작은 탁자도 있다. 항상 쉬어가는 곳인데 워낙 사..

사진속일상 2019.03.24

5월의 노래 / 괴테

아, 대자연이 찬연하게 내게 빛을 보내요! 아, 햇살이 밝게 비쳐요 온 들판이 미소 지어요! 가지가지 이파리마다 꽃망울 터지고 수풀 사이 수천 가지 노랫소리가 들려요 가슴 가슴마다 환희와 축복이 넘쳐요 오, 대지여, 태양이여, 기쁨이여, 환희여 오, 사랑이여, 사랑하는 이여! 저 높은 언덕 위 드높은 아침 구름처럼 모두가 황금빛으로 아름다워요! 찬연한 그대 모습도 온 들판을 환하게 축복해주는 이 넓은 세상을 온통 안개꽃으로 감싸요 소녀여, 소녀여, 그대를 사랑해요! 참으로 빛나는 그대의 눈빛! 나를 사랑하는 참으로 아름다운 그대! 사랑 때문에 종달새들도 높이 대기 속에서 노래하고 아침 꽃들도 모두 하늘 냄새를 사랑해요 뜨거운 가슴, 뜨거운 피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듯 그대는 내게 기쁨과 젊음과 용기를 줘요..

시읽는기쁨 2018.05.13

봄 / 반칠환

저 요리사의 솜씨 좀 보게 누가 저걸 냉동 재룐 줄 알겠나 푸릇푸릇한 저 싹도 울긋불긋한 저 꽃도 꽝꽝 언 냉장고에서 꺼낸 것이라네 아른아른 김조차 나지 않는가 - 봄 / 반칠환 마술사 같은 요리사의 솜씨다. 한쪽에서는 팡팡거리며 팝콘도 터진다. 풍성한 자연의 식탁이 펼쳐지고, 우리는 그저 수저만 잡으면 된다. 연례행사로 이런 대접 받아왔으니 의례 그러려니 하지만, 이건 기적이 아닌가. 바라보는 풍경에, 코를 간지리는 향기에, 가슴 콩당콩당 뛰어야 할 감사며 경외가 아닌가.

시읽는기쁨 2018.04.07

천마산 봄꽃

어느 때 찾아도 실망하지 않는 천마산의 봄이다. 이번에는 신현회원 세 명과 동행했다. 봄꽃을 보러 천마산을 찾은 건 7년 만이다. 남양주시 호평동에서 천마의 집을 지나 팔현계곡 상류까지 올라가는 코스가 꽃 산행길이다. 초입의 점현호색을 필두로 다양한 종류의 꽃을 볼 수 있다. 오랜만에 꽃 호사를 누렸다. 이번 산행에서는 노랑미치광이풀 꽃을 보여주겠다는 분을 만났다. 미치광이풀 꽃은 대부분이 자주색인데 노란색 꽃은 희귀종이라고 한다. 길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고 해서 나는 포기했고, 일행 중 한 사람이 따라가서 결국 사진을 찍어 왔다. 결과물을 보니 번거로웠어도 따라가 볼 걸 싶었다. 이번 길에서는 약 20종 가까운 꽃을 만났다. 그중 일부를 사진으로 남겼다. 점현호색, 현호색, 큰괭이밥, 얼레지, 만주바람..

꽃들의향기 2018.04.03

경안천변 봄꽃

맑고 미세먼지 걱정 없는 봄날이다. 오늘은 햇볕을 쬐기 위해 밖에 나선다. 겨울잠 자듯 주로 집안에서만 지내다 보니 응달의 삶이 되었다. 소매를 걷어 올리고 모자는 벗는다. 피부 세포가 기지개를 켜는 것 같다. 마음도 환해진다. 경안천을 따라 세 시간 반 걷다. 오랜만에 타박타박 걷는 재미가 새롭다. 틈틈이 천변에 핀 봄꽃을 구경하다. 버들강아지, 개불알풀, 냉이, 꽃다지, 개나리, 산수유.....

꽃들의향기 2018.03.30

봄바람난 년들 / 권나현

보소! 자네도 들었는가? 기어이 아랫마을 매화년이 바람이 났다네 고추당초보다 매운 겨우살이를 잘 견딘다 싶더만 남녘에서 온 수상한 바람넘이 귓가에 속삭댕께 안 넘어갈 재주가 있당가? 아이고~ 말도 마소! 어디 매화년 뿐이것소 봄에 피는 꽃년들은 모조리 궁딩이를 들썩이는디 아랫마을은 난리가 났당께요 키만 삐쩍 큰 목련부터 대그빡 피도 안 마른 제비꽃 년들까정 난리도 아닌갑소 워매 워매~ 쩌그 진달래 년 주딩이 좀 보소 뻘겋게 루즈꺼정 칠했네 워째야 쓰까이~ 참말로 수상한 시절이여 여그 저그 온 천지가 난리도 아니구먼 그려~ 워쩔 수 없제 잡는다고 되것어 말린다고 되것어 암만 고것이 자연의 순리라고 안 혀라 보소 시방 이라고 있을 때가 아니랑게 바람난 꽃년들 밴질밴질한 낯짝이라도 귀경할라믄 우리도 싸게 나가..

시읽는기쁨 2018.03.24

사월에 걸려온 전화 / 정일근

사춘기 시절 등교길에서 만나 서로 얼굴 붉히던 고 계집애 예년에 비해 일찍 벚꽃이 피었다고 전화를 했습니다. 일찍 핀 벚꽃처럼 저도 일찍 혼자가 되어 우리가 좋아했던 나이쯤 되는 아들아이와 살고 있는, 아내 앞에서도 내 팔짱을 끼며, 우리는 친구지 사랑은 없고 우정만 남은 친구지, 깔깔대며 웃던 여자 친구가 꽃이 좋으니 한 번 다녀가라고 전화를 했습니다. 한때의 화끈거리던 낯붉힘도 말갛게 지워지고 첫사랑의 두근거리던 시간도 사라지고 그녀나 나나 같은 세상을 살고 있다 생각했는데 우리 생에 사월 꽃잔치 몇 번이나 남았을까 헤아려보다 자꾸만 눈물이 났습니다. 그 눈물 감추려고 괜히 바쁘다며 꽃은 질 때가 아름다우니 그때 가겠다, 말했지만 친구는 너 울지, 너 울지 하면서 놀리다 저도 울고 말았습니다. - 사..

시읽는기쁨 2017.04.30

부러워라

12박 13일 동안 패키지로 유럽 여행을 다녀온 친구가 있다. 너무나 원기왕성한 친구다. 이 친구는 인천공항에 도착해서 집에 짐을 풀자마자 차로 한 시간 거리인 텃밭으로 달려가 땅을 고르고 채소를 심었다. 다음날은 시제를 지내러 KTX를 타고 목포로 내려갔다. 올라와서는 꽃 보러 산에 같이 가자고 한다. 먼 나라 여행을 다녀왔으면 피곤해서 며칠 쉬어야 정상이 아닌가. 도무지 감당할 수 없는 에너지다. 천생이 약골인 나는 이런 체력을 보면 너무 부럽다. 해외에 나갔다 오면 두 주일 정도는 헤매는 게 보통이다. 시차 부조화로 잠자는 시간이 흐트러지니 밤낮없이 약 먹은 병아리처럼 비실거린다. 도시 외출할 기운이 생기지 않는다. 이번에 뉴질랜드에서 돌아와서도 마찬가지였다. 겨우 회복되는 듯하여 바깥 걸음을 했다..

길위의단상 2017.04.12

봄의 서곡 / 노천명

누가 오는데 이처럼들 부산스러운가요 목수는 널판지를 재며 콧노래를 부르고 하나같이 가로수들은 초록빛 새옷들을 받아들었습니다 선량한 친구들이 거리로 거리로 쏟아집니다 여자들은 왜 이렇게 더 야단입니까 나는 포도鋪道에서 현기증이 납니다 삼월의 햇볕 아래 모든 이지러졌던 것들이 솟아오릅니다 보리는 그 윤나는 머리를 풀어헤쳤습니다 바람이 마음대로 붙잡고 속삭입니다 어디서 종다리 한 놈 포루루 떠오르지 않나요 꺼어먼 살구남기에 곧 올연한 분홍 베일이 씌워질까 봅니다 - 봄의 서곡 / 노천명 시절이 하 수상하니 봄이 와도 봄을 실감하지 못한다. 세월호는 3년만에 뭍으로 돌아왔고, 탄핵 당한 전직 대통령은 감방에 들어갔다. 묵직한 돌덩이가 짓누르는 것 같다. 곧 대통령 선거가 있지만 누가 되든 선거 후가 다시 걱정이..

시읽는기쁨 2017.04.01

봄날은 간다 / 최금진

사슴농장에 갔었네 혈색 좋은 사과나무 아래서 할아버지는 그중 튼튼한 놈을 돈 주고 샀네 순한 잇몸을 드러내며 사슴은 웃고 있었네 봄이 가고 있어요, 농장 주인의 붉은 뺨은 길들여진 친절함을 연방 씰룩거리고 있었네 할아버지는 사슴의 엉덩이를 치며 흰 틀니를 번뜩였네 내 너를 마시고 回春할 것이니 먼저 온 사람들 너댓은 빨대처럼 생긴 주둥이를 컵에 박고 한잔씩 벌겋게 들이키고 있었네 사과나무꽃 그늘이 사람들 몸속에 옮겨 앉았네 쭉 들이키세요, 사슴은 누워 꿈을 꾸는 듯했네 사람들 두상은 모두 말처럼 길쭉해서 어떤 악의도 없었네 누군가 입가를 문질러 닦을 때마다 꽃잎이 묻어났네, 정말 봄날이 가는 동안 뿔 잘리고 유리처럼 투명해진 사슴의 머리통에 사과나무 가지들이 대신 걸리고 할아버지 얼굴은 통통하게 피가 올..

시읽는기쁨 2016.05.25

한택식물원의 봄

봄 향기를 맡으러 아내와 한택식물원에 갔다. 신록 사이를 걸으며 다양한 봄꽃을 구경했다. 한택(韓宅)식물원은 1979년에 설립된 국내 최대의 식물원이다. 자생식물 2,400여 종과 외래식물 7,300여 종을 보유하고 있다. 한 바퀴 돌아보는데 두 시간 정도 걸린다지만 점심을 싸가지고 와서 하루 종일 놀아도 괜찮은 곳이다. 너무 꽃이 많으면 세세하게 들여다 보지 않게 된다. 이곳에서는 전체적인 분위기를 맛보면 된다. 인공의 정원이라 야생의 꽃과는 다른 느낌이다. 각각의 즐거움이 있는 법이다. 이번 나들이에는 아내와 함께 개량한복을 커플룩처럼 같이 입었는데, 사람들 시선을 좀 받았다. 그런데 개량한복을 입어 보니 무척 편하다. 앞으로 애용하게 될 것 같다. 한택식물원에서는 바오밥나무를 볼 수 있다. 에 나오..

꽃들의향기 2016.05.12

왜요? / 천양희

강변역이 강변에 있지 않고 학여울역에 여울이 없다니요? 물까마귀는 까마귀가 아니고 물새라니요? 섬개개비는 산새이면서 섬에서 살다니요? 송사리는 웅덩이에서 일생을 마치고 무소새는 평생 제 집이 없다니요? 질경이는 뿌리로 견디고 가마우지는 절벽에서 견디다니요? 푸른 소나무도 낙엽지고 더러운 늪에서도 꽃이 피다니요? 인생이란 느끼는 자에게는 비극이고 생각하는 자에게는 희극이라니요? 필연적인 것만이 무겁고 무게가 있는 것만이 가치가 있다니요? 사자별자리, 오늘밤 하늘에 봄이 왔음을 알립니다 회신 바랍니다, 이만 총총 - 왜요? / 천양희 저녁 무렵 밖에 나가면 머리 위에는 사자자리가 떠 있다. 서쪽으로는 오리온이 진다. 사자자리는 봄의 별자리다. 사자자리를 보고 하늘에도 봄이 온 걸 확인한다. 도시에 사는 사람..

시읽는기쁨 2016.05.01

봄 펜팔 / 반칠환

올해도 당신이 보내주신 편지 잘 받아보았습니다. '편지쓰기교본'을 베낀 듯 작년과 똑같은 내용이었습니다. 첫 줄엔 아지랑이 모락모락 안부를 묻고, 두 번째 줄엔 호랑나비 흰나비로 올해의 운세 물으셨죠. 그래도 눅눅한 겨울 다음엔 그만 한 위안도 없었습니다. 짐짓 눈 속 매화 한 점의 간결체로 시작된 당신의 문장은 점차 고조되기 시작합니다. 개나리의 만연체, 진달래의 우유체, 벚꽃의 화려체 따라 읽노라면 뭇벌과 새들 소리 시끄러워 눈 감고 귀 막기도 했지요. 젊은 날엔 왜 그리 문장의 배후만 헤아렸는지요. 흰꽃 속의 검은 빛, 꽃잎 속의 붉은 피, 순결 속의 타락, 환희 속의 비명을 찾으려 애썼습니다. 올해도 당신이 보내주신 편지 잘 받아보았습니다. '편지쓰기교본'을 그대로 베낀 듯 언제나 똑같은 내용이었..

시읽는기쁨 2016.04.24

통영

꽃이 피면 지는 게 자연의 원리지만, 다음 해에는 다시 화사한 모습으로 찾아올지 알지만, 오늘의 낙화는 언제나 우리를 슬프게 한다. 우리 역시 한 송이 꽃, 언젠가는 땅으로 돌아갈 날을 맞아야 할 것이다. 누가 먼저인지 모르기에 천 년을 살듯이 아무렇지도 않게 지내고 있을 뿐이다. 통영에서 1박을 한 아침, 숙소 화단에 떨어진 동백이 붉었다. 벚꽃이 거리와 산하를 환하게 덮은, 그렇지만 꽃구경할 엄두가 나지 않은 봄날이었다.

사진속일상 2016.04.07

오월의 유혹 / 김용호

곡마단 트럼펫 소리에 탑은 더 높아만 가고 유유히 젖빛 구름이 흐르는 산봉우리 분수인 양 쳐오르는 가슴을 네게 맡기고, 사양에 서면 풍겨오는 것 아기자기한 라일락 향기 계절이 부푸는 이 교차점에서 청춘은 함초롬히 젖어나고 넌 이브인가 푸른 유혹이 깃들어 감미롭게 핀 황홀한 오월 - 오월의 유혹 / 김용호 내가 다닐 때 고등학교 1학년 국어 교과서 표지를 열면 바로 이 시가 나왔다. 시 단원에 나오는 시가 아니고 교과서 전체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오월의 유혹'이 실려 있었다. 국어 선생님이 이 시를 설명하던 말과 동작까지 선명히 떠오른다. 언젠가 비슷한 또래의 친구들에게 이 시가 기억나느냐고 물으니 하나같이 모른다고 했다. 별난 걸 다 기억한다고 오해까지 받았다. 그래서 다른 데서 본 걸 내가 착각하고 있..

시읽는기쁨 2015.05.19

강변의 봄

집에 있기에는 몸이 간지러워 밖으로 나섰다. 환한 봄 햇살 때문이었다. 퇴촌의 한강변 벚꽃길을 가려고 했으나 차가 많이 막혀 경안천습지생태공원으로 방향을 돌렸다. 아직 가로수 벚꽃이 만개하지 않은 이유도 있었다. 이곳 벚꽃은 내주가 되어야 활짝 필 것 같다. 초록색으로 물들기 시작하는 강변 풍경이 고왔다. 봄을 'spring'이라고 하지 않는가, 용솟음치는 생명의 기운이 사방에서 느껴졌다. 강을 따라 난 벚꽃 길을 걸을 때 두보 시의 한 구절인 '國破山河在'가 무심결에 떠올랐다. 어김없이 찾아온 봄이 눈물 나도록 고마웠다.

사진속일상 2015.04.11

흑사탕

환절기가 되면 계절앓이를 한다. 일종의 통과의례다. 증상은 심신이 축 가라앉고 의욕이 없어지는 것으로 나타난다. 만사가 귀찮아지고 세상이 생기를 잃는다. 피곤해서 침대에 누워 있는 시간이 많다. 드디어 손님이 찾아오셨구나, 한다. 봄과 가을이 시작될 때가 심하다. 꽃이 피었건만 봐도 심드렁하다. 꽃을 보러 가자는 친구의 초청도 사절했다. 옆에서 아내는 걱정이 많지만 나는 대수롭지 않다. 연례행사임을 알기 때문이다. 이 손님은 건드리지 말고 그냥 가만히 지켜보면 된다. 제가 지겨워지면 슬그머니 빠져나간다. 조바심치면 도리어 죽치고 버티는 성질이 있다. 모른 척하는 게 최고다. 이럴 때 생각이 나는 게 단 음식이다. 집 앞 슈퍼에서 좋아하는 흑사탕을 몇 봉지 사 왔다. 우울할 때는 달콤한 게 제일이다. 소파..

길위의단상 2015.04.01

봄밤 / 김수영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 강물 위에 떨어진 불빛처럼 혁혁한 업적을 바라지 말라 개가 울고 종이 울리고 달이 떠도 너는 조금도 당황하지 말라 술에서 깨어난 무거운 몸이여 오오 봄이여 한없이 풀어지는 피곤한 마음에도 너는 결코 서둘지 말라 너의 꿈이 달의 행로와 비슷한 회전을 하더라도 개가 울고 종이 들리고 기적소리가 과연 슬프다 하더라도 너는 결코 서둘지 말라 서둘지 말라 나의 빛이여 오오 인생이여 재앙과 불행과 격투와 청춘과 천만 인의 생활과 그러한 모든 것이 보이는 밤 눈을 뜨지 않은 땅속의 벌레같이 아둔하고 가난한 마음은 서둘지 말라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 절제여 나의 귀여운 아들이여 오오 나의 영감(靈感)이여 - 봄밤 / 김수영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은 고래(古來)의 명언이다. 인간 사는 ..

시읽는기쁨 2015.03.01

봄 아침엔 창문을 여세요 / 이기철

봄 아침엔 창문을 여세요 그러면 풀들의 숨소리가 들릴 것입니다 발이 간지러운 풀들이 반짝반짝 발바닥 들어올리는 소리도 들릴 거예요 봄 아침엔 창문을 여세요 아픔처럼 꽃나무들 봉지 튀우는 소리 들릴 것입니다 햇살이 금가루로 쏟아질 때 열 마지기 논들에 흙이 물 빠는 소리도 들릴 거예요 어디선가 또옥똑 물방울 듣는 소리 새들이 언 부리 나뭇가지에 비비는 소리도 들릴 것입니다 사는 게 무어냐고 묻는 사람 있거든 슬픔과 기쁨으로 하루를 짜는 일이라고 그러나 오지 않는 내일을 위해 지레 슬퍼하지 말라고 산들이 저고리 동정 같은 꽃문 열 듯 동그란 웃음 하늘에 띄우며 봄 아침엔 화알짝 창문을 여세요 - 봄 아침엔 창문을 여세요 / 이기철 잔인하고 우울한 계절이 계속되고 있다. 온 나라도 그렇지만, 개인적으로도 어둡..

시읽는기쁨 2014.05.10

안산 꽃길

안산 자락길이 꽃길이 되었다. 예년보다 열흘 넘게 빨리 개화하면서 서울 벚꽃은 절정을 지나고 있다. 여의도를 비롯한 벚꽃 축제도 앞당겨 치렀다. 일찍 찾아온 봄이니 쉬이 갈 것이다. 생명이 있기에 유한하고, 유한한 것은 덧없다. 그중에서도 아름다움은 한 순간이다. 봄 꽃길을 걸으며 '봄날은 간다'를 흥얼거린다.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 오늘도 옷고름 씹어가며 산제비 넘나드는 성황당 길에 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 지면 같이 울던 알뜰한 그 맹세에 봄날은 간다 새파란 풀잎이 물에 떠서 흘러가더라 오늘도 꽃편지 내던지며 청노루 짤랑대는 역마차 길에 별이 뜨면 서로 웃고 별이 지면 서로 울던 실없는 그 기약에 봄날은 간다

꽃들의향기 2014.04.08

베란다의 봄

지난겨울에는 화분에 신경을 쓰지 못하고 그냥 방치해 놓다시피 했다. 그런데도 봄기운은 베란다에도 찾아왔다. 가까이 가면 색깔과 향기가 완연히 다르다. 그중에서도 사시사철 꽃을 피우는 제라늄이 기특하다. 지난 연말에 제주도행을 계획했을 때는 이 화분을 전부 어찌할까 고민했다. 그러나 모든 게 수포로 돌아갔고, 이제는 얘들과 어쩔 수 없이 같이 지내게 되었다. 가까이 다가가 귀 기울이면, 차라리 잘 되었어요, 라고 속삭이는 것 같다. 나도 미소지으며 고개를 끄덕여준다.

사진속일상 2014.03.21

그대 앞에 봄이 있다 / 김종해

우리 살아가는 일 속에 파도치는 날 바람 부는 날이 어디 한두 번이랴 그런 날은 조용히 닻을 내리고 오늘 일을 잠시라도 낮은 곳에 묻어두어야 한다 우리 사랑하는 일 또한 그 같아서 파도치는 날 바람 부는 날은 높은 파도를 타지 않고 낮게 낮게 밀물져야 한다 사랑하는 이여 상처받지 않은 사랑이 어디 있으랴 추운 겨울 다 지내고 꽃 필 차례가 바로 그대 앞에 있다 - 그대 앞에 봄이 있다 / 김종해 생활고를 견디지 못해 목숨을 끊는 사람들 소식이 연이어 들린다. 보도에 나오지 않는 것까지 포함하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런 선택을 하는지 가슴이 아플 따름이다. 지병으로 일을 할 수 없어 생활비를 벌지 못하게 된 어머니는 두 딸과 함께 이승을 버렸다. "죄송합니다. 마지막 집세와 공과금입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시읽는기쁨 2014.03.13

봄이 오는 뒷산

창밖으로 보이는 소나무가 아침부터 브레이크 댄스를 추고 있어서 센 바람을 맞고 싶어 뒷산에 올랐다. 때가 되면 변해가는 계절은 속일 수 없음인가, 산 능선에서 바람 앞에 섰으나 이미 찬 기운은 힘이 많이 빠져 있었다. 명색이 북풍인데 신세가 말이 아니었다. 한껏 잠바를 열어젖히고 가슴이 뻥 뚫리도록 바람을 맞았다. 겨울 동안은 전혀 출입을 하지 않았으니 석 달 만에 찾은 뒷산이었다. 봄이 가까워지면 숲에서는 새들이 먼저 분주해진다. 이 나무 저 나무로 옮겨다니며 바쁘기만 한 박새가 제일 많이 눈에 띄었다. 찌찌 쯔르르르, 새소리가 없다면 숲은 겨울잠에서 깨어나지 못할 것 같다. 산기슭에는 괭이눈 초록 잎이 돋아났고, 버들강아지도 고운 물을 들이고 있었다. 이제 곧 총천연색의 향연이 펼쳐질 것이다. 행복이..

사진속일상 2014.03.06

봄 논 / 이시영

마른논에 우쭐우쭐 아직 찬 봇물 들어가는 소리 앗 뜨거라! 시린 논이 진저리치며 제 은빛 등 타닥타닥 뒤집는 소리 - 봄 논 / 이시영 마른 논에 물 들어가는 소리 듣기 좋고, 자식 입에 밥 들어가는 모습 보기 좋다고 옛 어른들은 말씀하셨다. 논에 들어간 물이 벼를 키우고, 그 곡식이 생명을 기른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땅의 차가운 물과 하늘의 뜨거운 불이 만나 나락을 만드는 것이다. 알갱이 하나하나는 곧 물과 불의 결합이다. 어렸을 때는 논두렁을 따라 잘 다녔다. 개울로 놀러 나갈 때는 논두렁을 지나야 했고, 학교에 오갈 때도 지름길이 논두렁이었다. 논두렁을 따라 걸을 때면 그 폭신폭신한 감촉이 좋았다. 좁아서 조심해야 했지만 장난꾸러기들은 일부러 뛰어가는 스릴을 즐겼다. 논두렁에는 한두 개 쯤 물이 ..

시읽는기쁨 2013.05.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