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작은 짐승 / 신석정

샌. 2008. 12. 23. 11:01

난(蘭)이와 나는

산에서 바다를 바라다보는 것이 좋았다

밤나무

소나무

참나무

느티나무

다문다문 선 사이사이로 바다는 하늘보다 푸르렀다

 

난이와 나는

작은 짐승처럼 앉아서 바다를 바라다보는 것이 좋았다

짐승같이 말없이 앉아서

바다같이 말없이 앉아서

바다를 바라다보는 것은 기쁜 일이었다

 

난이와 내가

푸른 바다를 향하고 구름이 자꾸만 놓아 가는

붉은 산호와 흰 대리석 층층계를 거닐며

물오리처럼 떠다니는 청자기빛 섬을 어루만질 때

떨리는 심장같이 자지러지게 흩날리는 느티나무 잎새가

난이의 머리칼에 매달리는 것을 나는 보았다

 

난이와 나는

역시 느티나무 아래에 말없이 앉아서

바다를 바라다보는 순하디 순한 작은 짐승이었다

 

- 작은 짐승 / 신석정

 

시대가 암담하면 서정적 세계에 대한 그리움은 커져가는가 보다. 이 시는 1930 년대에 씌어진 것으로 알고 있다. 현실 인식이 부족하다고 비판도 받지만 건조하고 희망이 없는 세상에서 그나마 사람을 살리는 힘은 이런 서정성에서 나온다는 것을 나는 믿는다.

 

사람들은 모두 한때는 '문소'[문학소녀소년]들이었다. 그때 세상은 아름답게 빛났고 꿈은 풍선처럼 부풀었다. 또 사탕 한 알에도 온 세계를 얻은 듯 행복해 하던 동심의 시절이 있었다. 철이 없었으나 착하고 순수했던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은 것이 나 하나만은 아닐 것이다.시는 과거를 회상하는 것에서 그런 이상세계를 동경하고 있다. 난(蘭)이는 과거의 소녀가 아니라시인이만나고 싶은 이상적인 여인으로 읽혀진다. 세상사 모두 잊고 그저 순하디 순한 작은 짐승으로 살고픈 것이 어찌 시인만이랴. 이제는 사라져버린 동화의 나라가 더욱 그리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