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시래기 한 웅큼 / 공광규

샌. 2008. 12. 14. 06:45

빌딩 숲에서 일하는 한 회사원이

파출소에서 경찰서로 넘겨졌다

점심 먹고 식당 골목을 빠져나올 때

담벼락에 걸린 시래기를 한 웅큼 빼서 코에 부비다가

식당 주인에게 들킨 것이다

"이봐. 왜 남의 재산에 손을 대!"

반말로 호통치는 주인에게 회사원은

미안하다며 사과했지만

막무가내 식당 주인과 시비를 벌이고

멱살잡이를 하다가 파출소까지 갔다

화해시켜 보려는 경찰의 노력도

그를 신임하는 동료들이 찾아가 빌어도

식당 주인은 한사코 절도죄를 주장했다

한 몫 보려는 식당 주인은

그동안 시래기를 엄청 도둑 맞았다며

한 달치 월급이 넘는 합의금을 요구했다

시래기 한 줌 합의금이 한 달치 월급이라니!

그는 야박한 인심이 미웠다

더러운 도심의 한가운데서 밥을 구하는 자신에게

화가 났다

"그래, 그리움을 훔쳤다. 개새끼야!"

평생 주먹다짐 한 번 안 해본 산골 출신 그는

찬 유치장 바닥에 뒹굴다가 선잠에 들어

흙벽에 매달린 시래기를 보았다

늙은 어머니 손처럼 오그라들어 부시럭거리는

 

- 시래기 한 웅큼 / 공광규

 

이 시대의 도시는 돈 독이 올라 정신이 나간 자들이 모여 사는 '미치광이들의 도시'가 되었다. 여기서는 소돔과 고모라 같은세기말의 풍경들이 별로 낯설지 않다. 얼마 전에 아이들끼리 싸움이 붙어 얼굴에 상처가 생기는 일이 벌어졌다. 그런데 피해자 학부모가 합의금으로 요구한 금액이 무려 이천만 원이었다. 병원 치료비는 일백 만원도 나오지 않은 부상이었다. 예전 같았으면 아이들이 놀다 보면 그럴 수도 있지요 하며 치료비마저 사양했는데 이젠 안면몰수하고 한 몫을 챙기려 든다.그러지 않으면 바보로 보이는 세상이다. 그런데 이 돈 독 바이러스는 전염성이 강해 이젠 전국 어디에도 청정 지역은 없다.

 

고향 내음이 그리워 시래기 한 번 잘못 만졌다가 유치장에 갇힌 이 사람의 신세가 바로 내가 될 수도 있는 세상이다. 그렇게 야박해진 인심이 밉고, 그 가운데서 밥을 구해야 하는 자신에 화가 나는 것이 어디 시인뿐이랴. 어제는 도심의 길가에서 딸랑거리는 구세군 냄비 옆을 지나는데 한 사람이 이렇게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내가 먹고 살기도 힘든데 누굴 도와 달라고 해, 개새끼들." 유명 등산복을 입고 산에 다녀오는 듯한 한 중년 사내의 싸늘한 눈빛이 아직도 섬뜩하다. '눈 먼 자들의 도시'는 바로 지금 우리의 현실이기도 하다.

 

좋은 시는 이렇게 쉬우면서도 가슴을 쿵 하고 울린다. 시인의 다른 작품들도 함께 읽어본다.

 

술집과 노래방을 거친

늦은 귀가길

 

나는 불행하게도

이웃집 여자가 보고 싶다

 

그래도 이런 나를

하느님은 사랑하시는지

 

내 발자국을 따라오시며

자꾸자꾸 폭설로 지워주신다

 

- 폭설 / 공광규

 

 

뒤축이 다 닳은 구두가

살이 부러진 우산을 들고 퇴근한다

 

당신의 창의력이 너무 늙었어요!

나이 어린 사장의 말이 뼈아프다

 

망가진 우산에서 쏟아지는 빗물이

슬픔의 나이를 참으라고 참아야 한다고

기운 어깨를 다독거린다

 

너, 계속 이렇게 살거야?

심란한 비바람이

넥타이를 움켜잡고 흔들어댄다

 

빗물이 들이치는 낡은 포장마차 안

술에 젖은 몸관악기가

악보 없이 운다

 

- 몸관악기 / 공광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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