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나의 경제 / 안도현

샌. 2008. 12. 19. 11:26

구두를 신으면서 아내한테 차비 좀, 하면 만 원을 준다

전주까지 왔다 갔다 하려면 시내버스가 210원 곱하기 4에다

더하기 직행버스비 870원 곱하기 2에다

더하기 점심 짜장면 한 그릇값 1,800원 하면

좀 남는다 나는 남는 돈으로 무얼 할까 생각하면서

벼랑 끝에 내몰린 나의 경제야, 아주 나지막하게

불러본다 또 어떤 날은 차비 좀, 하면 오만 원도 준다

일주일 동안 써야 된다고 아내는 콩콩거리며 일찍 들어와요 하지만

나는 병천이형한테 그동안 술 얻어먹은 것 염치도 없고 하니

그런 날 저녁에는 소주에다 감자탕이라도 사야겠다고 생각한다

또 며칠 후에 구두를 신으면서 아내한테 차비 좀, 하면

월말이라 세금 내고 뭐 내고 해서 천 원짜리 몇 뿐이라는데

사천 원을 받아들고 바지주머니 속에 짤랑거리는 동전이 얼마나 되나

손을 슬쩍 넣어 본다 동전테가 까끌까끌한 게 많아야 하는데

손톱 끝이 미끌미끌하다 나는 갑자기 쓸쓸해져서

오늘 점심은 라면으로나 한 끼 때울까 생각한다

또 그 다음 날도 구두를 신으면서 아내한테 차비 좀, 하면

대뜸 한다는 말이 뭐 때문에 사는지 모르겠다고

유경이 피아노학원비도 오늘까지 내야 한다고 아내는

운다, 나는 슬퍼진다 나는 도대체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다

어제도 그랬다 길 가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가

새끼들 데리고 요즘 어떻게 먹고 사느냐고, 근심스럽다는 듯이

나의 경제를 훤히 들여다보고 있다는 듯이 물었을 때

나는 그랬다 살아보니까 살아지더라, 잘 먹고 잘 산다고

그게 지금은 후회된다 좀더 고통의 포즈를 취할 것을

이놈의 세상 팍 갈아엎어 버려야지, 하며 주먹이라도 좀 쥐어볼 것을

아니면, 나는 한 달에 전교조에서 나오는 생계보조비를

31만 원이나 받는다 현직에 계신 선생님들이 봉급에서 쪼개 주신 거다

그래 자기 봉급에서 다달이 만 원을 쪼개 남에게 준다는 것

그것 받을 때마다 받는 사람 가슴이 더 쓰린 것

이것이 우리들의 이데올로기다 우리들의 사상이다

이렇게 자랑이라도 좀 떠벌이면서 그래서

입으로만 걱정하는 친구놈 뒤통수나 좀 긁어줄 것을

나의 경제야, 나는 내가 자꾸 무서워지는구나

사내가 주머니에 돈 떨어지면 좁쌀처럼 자잘해진다고

어떻게든 돈 벌 궁리나 좀 해 보라고 어머니는 말씀하시지만

그까짓 돈 몇 푼 때문에 친구한테도 증오를 들이대려는

나 자신이 사실은 더 걱정이구나 이러다가는 정말

작아지고 작아지고 작아져서 한 마리 딱정벌레나 되지 않을지

나는 요즘 그게 제일 걱정이구나

 

- 나의 경제 / 안도현

 

추운 계절이다. 온난화로 지구 기온은 올라간다는데 시대의 냉기는 점점 더 차가워진다. 무슨 이유가 되었든 밥벌이의 일터를 잃은 사람에게 이 겨울은 더욱 쓸쓸하고 스산할 것이다. 일곱 명의 교사가 다시 교문 밖으로 쫓겨났다.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줄 알았는데, 참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시인도 해직교사의 아픈 경험을 가지고 있다. 먹고사는 것의 경계에 섰을 때의 심정이 이 시에는 잘 나타나 있다. 그러나 단순히 먹고사는 문제만은 아닐 것이다. 어쩌면세상에 대한 절망, 변화에 대한 막막함이 시인을 더 힘들게 했을 것이다. 물질적으로는 아무리 궁핍하더라도 언젠가는 우리의 꿈과 이상이 꽃 피리라는 희망이 있다면, 또 세상이 그런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믿음이 있다면 그 어떤 시대의 가혹함도 기꺼이 견딜 수 있겠기 때문이다. 별이 있어도 별을 볼 수 없는, 머리 위의 하늘은 먹구름으로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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