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눈은 너무 작으니까 / 유안진

샌. 2008. 12. 9. 10:57

물고기의 눈에는 물이 안 보이고

새의 눈에는 공기가 안 보이고

용의 눈에는 돌이 안 보인다지

 

꽃이 피면 꽃나무는 안 보이고

열매가 열리면 가지는 안 보이고

아기를 안으면 엄마 아빠는 안 보이지

 

젊은 가장을 대신하여 독가스실로 들어가 준

막시밀리언 콜베 신부도

나치의 눈에는 유태인으로만 보였지

 

마음은 공기는 우주는 神은 안 보이니까

눈은 너무 작으니까

눈이라고 다 눈은 아니니까

 

- 눈은 너무 작으니까 / 유안진

 

사람은 보이는 것을 보는 게 아니라 보고 싶은 것을 본다고 한다. 그리고 자신이 보는 것을 전부인 줄 착각한다. 물리적으로도 인간의 눈이 보는 것은 전자기 스펙트럼의 극히 일부분일 뿐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가 얼마나 넓게 펼쳐져 있는지 우리는 잊고 산다. 생각 또한 마찬가지다. 자신이 믿는 것이 절대 진리라고 여기며, 자신의 관점이 세상의 표준인 양 행동한다. 그러나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수많은 차원의 세계가 있는 줄은 의식하지 않는다.

 

우리가 볼 수 있는 좁디 좁은 세상에서조차 못 보는 것이 많다. 꽃이 피면 나무가 안 보이고, 열매가 열리면 가지가 안 보이고, 아기를 안으면 엄마 아빠가 안 보인다. 너무나 익숙해서 눈에 안 띄는 존재들이 실은 가장 소중하고 귀한 것들이다. 안다는 것은 쓰레기 같은 지식을 쌓는 일이 아니라 내가 제대로 아는 것이 하나도 없음을 깨닫는 것인지 모른다.내 눈은 너무 작아 진짜 중요한 것을 보지 못한다. 또 한 살의 나이를 보태며 한 해를 마무리하는 이때, 스스로의 분수를 깨닫고 더욱 겸손해져야겠다. 좀더 낮아지고 목소리를 낮추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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