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마른 들깻단 / 정진규

샌. 2008. 12. 2. 09:31

다 털고 난 마른 들깻단이 왜 이리 좋으냐 슬프게 좋으냐 눈물 나게 좋으냐 참깻단보다 한참 더 좋다 들깻단이여, 쭉정이답구나 늦가을답구나 늦은 아버지답구나 빈 밭에 가볍게 누운 그에게서도 새벽 기침 소리가 들린다 서리 맞아 반짝거리는 들깻단, 슬픔도 저러히 반짝거릴 때가 있다 그런 등성이가 있다 쭉정이가 쭉정이다워지는 순간이다 반짝이는 들깻단, 잘 늙은 사람내 그게 반가워 내 늙음이 한꺼번에 그 등성이로 달려가는게 보인다 늦가을 앞산 단풍은 무너지도록 밝지만 너무 두껍다 미끄럽다

- 마른 들깻단 / 정진규

고소한 깨보다 들판의마른 들깻단에 더 시선이 가는 나이가 되었다. 젊음의 패기와 욕망도 좋지만 노년의 텅 비워지고 가벼워진 마른 자리도 아름답다. 인생에는 이루어야 할 때가 있고, 비우고 내보내야 할 때도 있다. 비워야 할 때 비우지못하고 가벼워지지 못하면 추하다. 이 시를 읽으면 늙음과 소멸도 참 아름답고 따스하다는 느낌이 든다. 들판의 마른 들깻단처럼 잘 늙은 사람내 나는 사람이 되고 싶다. 잘 늙은 사람내, 그게 반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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