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지조론 / 박주택

샌. 2008. 11. 19. 09:41

견딜 때까지 견디게나.

최후의 악이 부드럽게 녹아

인격이 될 때까지.

고통?

 

견디게나.

편안한 시간이란 쉬 오지 않는 법.

상처가 깊으면 어때.

깊을수록 정신은 빳빳한 법.

 

생각 끝의 끝에서라도

견디게나.

그 어떤 비난이 떼를 지어 할퀸다 할지라도

벼랑 끝에 선 채로 최후를 맞을지라도.

 

아무렴! 끝끝내 견디다가

산맥의 지리쯤은 미리 익혀놓은 후

영영 죽을 목숨일 때

바위, 뻐꾸기, 청정한 나무,

뭐 그쯤으로 환생하게.

 

- 지조론 / 박주택

 

죽비처럼 정신을 번쩍 들게하는 시가 있다. 느슨하고 나른해지는 정신이 화들짝 놀란다. 좀더 치열하고 깊이 살아야 하는데라는 반성이 뒤따른다. 이 시를 만났을 때 문득 추사의 세한도가 떠올랐다. '歲寒然後知松栢'(날씨가 추워진 뒤에야 송백의 진가를 알게 된다).

 

시인은 상처가 깊을수록 정신은 더욱 빳빳한 법이라고 했다.그 상처가 깊고 깊어져 영영 죽을 목숨이 될 때야 아름다운 존재로환생할 수 있는지 모른다. 그러나 최후의 악이 부드럽게 녹아 인격이 될 때까지 또한 버티고 견뎌야 한다. 이 시에서는 서슬 푸른 기개와 지조가 느껴진다.

 

또한 시의 제목 때문인지 조지훈의 '지조론'도 생각난다. 님은글의첫머리에서 '지조(志操)란 순일(純一)한 정신을 지키기 위한 불타는 신념이요, 눈물겨운 정성이며, 냉철한 확집(確執)이요, 고귀한 투쟁이다'고 썼다. 나의 순일한 정신을 지키기 위해서 불타는 신념까지는 아니더라도 작은 정성이라도 기울이고 있는지 부끄럽게 되돌아본다. 아무래도 난 변절자가 되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