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꿈을 비는 마음 / 문익환

샌. 2009. 1. 1. 07:11

개똥 같은 내일이야

꿈 아닌들 안 오리오마는

조개속 보드라운 살 바늘에 찔린 듯한

상처에서 저도 몰래 남도 몰래 자라는

진주 같은 꿈으로 잉태된 내일이야

꿈 아니곤 오는 법이 없다네

 

그러니 벗들이여!

보름달이 뜨거든 정화수 한 대접 떠 놓고

진주 같은 꿈 한자리 점지해 줍시사고

천지신명께 빌지 않으려나!

 

벗들이여!

이런 꿈은 어떻겠오?

155마일 휴전선을

해뜨는 동해바다 쪽으로 거슬러 오르다가 오르다가

푸른 바다가 굽어 보이는 산정에 다달아

국군의 피로 뒤범벅이 되었던 북녘땅 한 삽

공산군의 살이 썩은 남녘땅 한 삽씩 떠서

합장을 지내는 꿈,

그 무덤은 우리 5천만 겨레의 순례지가 되겠지

그 앞에서 눈물을 글썽이다 보면

사팔뜨기가 된 우리의 눈이 제대로 돌아

산이 산으로, 내가 내로, 하늘이 하늘로,

나무가 나무로, 새가 새로, 짐승이 짐승으로,

사람이 사람으로 제대로 보이는

어처구니없는 꿈 말이외다

 

그도 아니면

이런 꿈은 어떻겠오?

철들고 셈들었다는 것들은 다 죽고

동남동녀들만 남았다가

쌍쌍이 그 앞에 가서 화촉을 올리고

- 그렇지, 거기는 박달나무가 있어야지 -

그 박달나무 아래서 뜨겁게들 사랑하는 꿈,

그리고는 동해바다에서 치솟는 용이 품에 와서 안기는 태몽을 얻어

딸을 낳고

아침 햇살을 타고 날아오는

황금빛 수리에 덮치는 꿈을 꾸고

아들을 낳는

어처구니없는 꿈 말이외다

 

그도 아니면

이런 꿈은 어떻겠소?

그 무덤 앞에서 샘이 솟아

서해 바다로 서해 바다로 흐르면서

휴전선 원시림이

압록강 두만강을 넘어 만주로 펼쳐지고

한려수도를 건너뛰어 제주도까지 뻗는 꿈,

그리고 우리 모두

짐승이 되어 산과 들을 뛰노는 꿈,

새가 되어 신나게 하늘을 나는 꿈,

물고기가 되어 펄떡펄떡 뛰며 강과 바다를 누비는

어처구니없는 꿈 말이외다

 

비나이다 비나이다

천지신명께 비나이다

밝고 싱싱한 꿈 한자리

평화롭고 자유로운 꿈 한자리

부디 점지해 주사이다

 

- 꿈을 비는 마음 / 문익환

 

2009 년을 여는 시로 이 시를 골랐다. 새 꿈과 희망으로 다시 한 해를 시작한다. 많은 사람들이 새해의 첫 해를 보며 자신의 꿈과 소망을 빌었을 것이다. 그 모든 맑은 꿈들이 큰 강줄기를 이루고 바다가 되어 이 세상이 진정 복되고 아름다운 땅으로 변했으면 좋겠다. 한 사람이 꾸는 꿈은 어처구니없을 수가 있지만, 수천 수만의 사람들이 같은 꿈을 꾸면 그것은 현실이 될 수 있다.

 

새해에는

착하고 순한 사람들이 많아졌으면,

맑고 밝은 눈동자의 사람들을 많이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런 사람들이 모여 아기자기 오순도순 살아가는 작은 마을들이 이 산 저 산 아래에 생겼으면 좋겠고,

시인이 꿈 꾼 것처럼

사팔뜨기 우리의 눈이 제대로 돌아와

산이 산으로, 강이 강으로, 사람이 사람으로

제대로 보이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랬으면 정말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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