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춤 / 이종암

샌. 2009. 6. 19. 09:59

그녀한테서 문자가 왔다

팔공산 영불암* 오르는 길, 연초록 드레스를 입은 무용수들이 일제히 왈츠를 추고 있어요

 

어쩌란 말인가

그 왈츠의 상대는 아마도 푸른 바람이겠지

연초록 나뭇잎들이 일제히 바람과 손 맞잡고

왈츠를 춘다고, 하하

그렇게 우리도 손 맞잡고 춤추자는 것인가

 

부처를 맞이한다는 영불암 가는 길이니

소신공양燒身供養

몸과 마음마저 다 내어주는 사랑을

저도 알고 있는 것이겠지

 

춤을 추자고 한다

사랑은 끝없이 춤추는 거라고, 그녀가

대낮에 춤추는 문자를 보내왔다

 

골똘히, 춤 속으로 나는 걸어간다

 

* 그녀가 말한 팔공산 영불암은 염불암의 오기였다. 그러나 어쩌랴, 처음 그녀가 보내준 문자대로 영불암을 마음에 들고 나는 이미 이렇게 시를 써버린 것을

 

- 춤 / 이종암

 

사랑에 대한 남자의 독법을 이 시는 재미있게 그려내고 있다. 얼마만큼 아는 사이인지 모르지만 하여튼 아는 여자에게서 문자가 왔다. 여자는 팔공산 영불암 오르는 길에 바람에 춤추는 나뭇잎을 보고 그에게 문자를 보낸 것이었다. 여자의 묘사는 사뭇 시적이다. 그런데 시인의 연상은 이내 화성인의 길로 빠진다. 더구나 절집에 가는 길이라고 소신공양(燒身供養)을 생각해 내고는 은근히 그녀의 몸을 탐한다. 이런 것이 화성인들의 환상이고 사랑법이다. 나뭇잎의 팔랑거림이 어느새 둘만의 은밀한 춤으로 비약되었다. 그리고 시인은 골똘히 그 환상 속으로 빠져든다. 금성인이 되어 보지 않아서 단정할 수는 없지만 화성인의 뇌구조는 확실히 금성인과는 다른 것 같다.

 

어찌 보면 부끄럽고 음탕하기까지 한 욕망을 시는 담담하고 재미있게 풀어내고 있다. 사랑에 대한 한없는 갈망, 그러나 어쩌랴, 그 또한 우리의 본성 중 하나이고 생명에너지의 원천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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