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눈 / 김수영

샌. 2009. 6. 30. 09:46

눈은 살아있다

떨어진 눈은 살아있다

마당 위에 떨어진 눈은 살아있다

 

기침을 하자

젊은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

눈 위에 대고 기침을 하자

눈더러 보라고 마음놓고 마음놓고

기침을 하자

 

눈은 살아있다

죽음을 잊어버린 영혼과 육체를 위하여

눈은 새벽이 지나도록 살아있다

 

기침을 하자

젊은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

눈을 바라보며

밤새도록 고인 가슴의 가래라도

마음껏 뱉자

 

- 눈 / 김수영

 

예전부터 이 시에 나타난 눈의 이미지를 어떻게 읽을지 망설여졌다. 하얀 눈은 순수와 순결의 상징이지만 여기서는 꼭 그렇지만도 아닌 것 같다. 그래서 좀 삐딱한 독해을 하고 싶다.

 

눈은 세상의 사물을 한 가지 색으로 덮어 버린다. 눈으로 보기에는 아름다운 풍경일지 모르지만 그것이 세상의 진실은 아니다. 그래서 눈을 '순수로 위장된 거짓'이라고 볼 수도 있다. 눈이 온다고 그저 강아지처럼 반기고 즐겨서는 안 된다. 눈의 정체를 꿰뚫어보는 눈이 없다면 그것은 단지 어리석은 천진난만함일 뿐이다.

 

햇살이 비치면 눈은 저절로 녹아 사라진다. 그러나 햇살이 없는 어두운 세상에서는 눈은 살아있다. 눈이 살아있는 현실이란 암담하고 절망적인 상황을 가리킨다. 이때 깨어있는 인간은 눈 덮인 세상의거짓을 밝히고 그에 저항한다. 시인이 기침을 하고 가래를 뱉자는 것은 그런 의미가 아닌가 싶다. 눈 위에 뱉은 가래란 바로 그런 살아있는 인간의 저항정신을 나타낸다.

 

지금 우리의 현실이 이와 다르지 않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비상식적인 일들이 다반사로 일어나고, 인간이나 생명에 대한 존경심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차가운 세상이 되었다. 나라의 지도자부터가 천박한 사고에 물들어 있다. 돈이면 최고인 세상에서 아이들은 더욱 경쟁으로 내몰리고 심성은 황폐해지고 있다. 당연한 권리라 여겼던 민주주의마저도 후퇴하고 집회와 표현의 자유마저 억압되는 상황이 되었다. 자신들의 정책에 반대한다고 잡아가두고, 언론에는 재갈을 물린다.그들이 말하는민주주의란 결정된 정책을 밀어붙이는 다수결의 폭력을 가리킬 뿐, 소수나 약자에 대한 배려는 찾아보기 어렵다.

 

"이기는 길은 모든 사람이 공개적으로 정부에 옳은 소리로 비판해야 하겠지만, 그렇게 못하는 사람은 투표를 해서 나쁜 정당에 표를 주지 않으면 된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나쁜 신문을 보지 않고, 또 집회에 나가고 하면 힘이 커진다. 작게는 인터넷에 글을 올리면 된다. 하려고 하면 많다. 하다못해 담벼락을 쳐다보고 욕을 할 수도 있다." 이 말은 얼마 전에 DJ가 어느 모임에서 한 발언이다.

 

이런 시대일수록 젊은 시인의 정신을 가지고 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안다. 더구나 눈에다 가래를 뱉는 것은 두려운 일이다. 그러나 침묵과 굴종은 죄악이다. 또 지금은 거창한 투쟁만이 아니라 작은 실천 하나가 더욱 필요한 시점인지도 모른다. 개개인의 깨인 의식이 모여서 바다를 이루는 날, 우리들이 꿈꾸는 아름다운 세상은 찾아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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