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영목에서 / 윤중호

샌. 2009. 6. 25. 09:14

어릴 때는 차라리, 집도 절도 피붙이도 없는 처량한 신세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뜬구름처럼 아무 걸림 없이 떠돌다 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한때는 칼날 같은 세상의 경계에 서고 싶은 적이 있었다. 자유라는 말, 정의라는 말, 노동이라는 말, 그리고 살 만한 세상이라는 말, 그 날 위에 스스로 채찍질하며 고개 숙여 몸을 던져도 좋다고 생각했다.

한때는 귀신이 펑펑 울 그런 해원의 詩를 쓰고 싶었다. 천년의 세월에도 닳지 않을, 언뜻 주는 눈길에도 수만 번의 인연을 떠올려 서로의 묵은 업장을 눈물로 녹이는 그런 詩.

이제 이 나이가 되어서야, 지게작대기 장단이 그리운 이 나이가 되어서야, 고향은 너무 멀고 그리운 사람들 하나 둘 비탈에 묻힌 이 나이가 되어서야, 돌아갈 길이 보인다.

대천 뱃길 끊긴 영목에서 보면, 서해 바다 통째로 하늘을 보듬고 서서 토해내는 그리운 노을을 가르며 날아가는 갈매기.

아무것도 이룬 바 없으나, 흔적 없어 아름다운 사람의 길,

어두워질수록 더욱 또렷해.

- 영목에서 / 윤중호

어두워질수록 별빛은 더욱 밝고, 길 끊어진 곳에서 만나는 새 길이 고맙다. 그 길은 아무 것도 이룬 바 없고, 흔적조차 없어 아름다운 길이다. 이렇듯 인생의 어느 때에 이르면 유위(有爲)의 세계를 넘어선 지점에서무위(無爲)의 세계가 축복처럼 찾아온다. 온갖 물상과 욕망들이 저녁 어스름에 잠기고, 노을을 날아가는 무심한 새들의 날개짓만이 선연해진다. 무지갯빛 꿈도, 역발산기개세(力拔山氣蓋世)의 야망도 한낱 먼지로 가벼워진다. 물론 모든 사람이 그러한 건 아니지만, 이 나이가 되어서야 보이는 그 길은 얼마나 아름다운지....

한 세기를 넘게 살아오신 외할머니가 자리에 누우셨다. 정신을 놓으시고도 부지런하셨는데 이젠 육신마저 놓으시려는가 보다. 고단했던 육신도 덜어내고 덜어내어 이젠 새처럼 가벼워지셨다. 이번 주말에는 고향의 외할머니를 뵈러 갈 예정이다. 어쩌면 생전의 마지막 대면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아프다.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사람의 길이 이토록 힘들고 고통스럽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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