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그리운 악마 / 이수익

샌. 2009. 6. 15. 10:22

숨겨 둔 情婦 하나

있으면 좋겠다.

몰래 나 홀로 찾아 드는

외진 골목길 끝, 그집

불 밝은 窓門

그리고 우리 둘 사이

숨막히는 暗號 하나 가졌으면 좋겠다.

 

아무도 눈치 못 챌

비밀 사랑,

둘만이 나눠 마시는 罪의 달디단

祝杯 끝에

싱그러운 젊은 심장의 피가 뛴다면!

 

찾아가는 발길의 고통스런 기쁨이

만나면 곧 헤어져야 할 아픔으로

끝내 우리

침묵해야 할지라도,

 

숨겨 둔 情婦 하나

있으면 좋겠다.

머언 기다림이 하루종일 전류처럼 흘러

끝없이 나를 충전시키는 여자,

악마 같은 여자.

 

- 그리운 악마 / 이수익

 

아무리 시인일지라도 이렇게 적나라하게 속마음을 드러내도 되는지 모르겠다. 다른 사람 눈치도 있을 텐데, 더구나 시인의 부인이 이 시를 본다면 기분이 어떨지 헤아리기나 했는지. 그러나 한 편으로는 시인의 솔직함이 부럽다. 관습이나 도덕률의 틀에 갇히지 않는 정신의 자유로움이 없다면 어찌 시인이라 할 수 있겠는가.

 

이런 것이 남자들만의 로망은 아닐 것이다. 인간 본성에서야여자도 마찬가지가 아니겠는가. 다만 사랑이나 그리움을 표현하는 방식에서의 차이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때는 그 차이가 하늘과 땅 만큼이나 멀게도 느껴진다. 어쨌든 이런 불순한 로망을 꿈꾸지 않는 남성은 거의 없다고 본다. 그것이 환상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쉼없이 작동되는 성(性)에의 끌림, 인간 본성에 내재된 그 생명에너지가 오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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