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팔꽃 새 움이 모자처럼 볼록하게 흙을 들어 올리는 걸 보면 나는 세상이 너무 아름다워질까 두렵다
어미 새가 벌레를 물고 와 새끼 새의 입에 넣어주는 걸 보면 나는 세상이 너무 따뜻해질까 두렵다
몸에 난 상처가 아물면 나는 세상을 너무 사랑할까 두렵다
저 추운 가지에 매달려 겨울 넘긴 까치집을 보면 나는 이 세상을 너무 사랑할까 두렵다
이 도시의 남쪽으로 강물이 흐르고 강둑엔 벼룩나물 새 잎이 돋고 동쪽엔 살구꽃이 피고 서쪽엔 초등학교 새 건물이 들어서고 북쪽엔 공장이 지어지는 것을 보면
나는 이 세상을 너무 사랑할까 두렵다
서문시장 화재에 아직 덜 타고 남은 포목을 안고 나오는 상인의 급한 얼굴을 보면
찔레꽃 같이 얼굴 하얀 이학년이 가방을 메고 교문을 들어가는 걸 보면
눈 오는 날 공원의 벤치에 석상처럼 부둥켜안고 있는 가난한 남녀를 보면
나는 이 세상을 너무 사랑할까 두렵다
그러고 보면 나는 이 세상 여리고 부드러운 것만 사랑한 셈이다
이제 좀 거칠어지자고 다짐한 것도 여러 번, 자고 나면 다시 제 자리에 와 있는 나는
아, 나는 이 세상 하찮은 것이 모두 애인이 될까 두렵다
- 나는 세상을 너무 사랑할까 두렵다 / 이기철
그래도 세상은 사랑할 만하다고 시인은 말한다. '두렵다'는 말은 '사랑하고 싶다'는 애절한 바람으로 들린다. 죽음의 땅에도 봄이 찾아오고 있다. 겨울 한파를 견딘 생명이 연초록 새 잎을 내민다. 사라진 게 아니었다. 보이지 않았을 뿐이다. 상처 받고 베인 시인의 마음이 태고의 생명력, 그 순한 기운 앞에서 다시 말랑말랑해진다. 따뜻해진다. 여리고 부드러운 너희들을 잊을까 이젠 두렵다. 있어도 보지 못하는 청맹과니가 될까 두렵다. 내 마음에서 경이와 사랑이 사라질까 사실은 그게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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