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다행이라는 말 / 천양희

샌. 2011. 3. 4. 10:59

환승역 계단에서 그녀를 보았다 팔다리가 뒤틀려 온전한 곳이 한군데도 없어 보이는 그녀와 등에 업힌 아기 그 앞을 지날 때 나는 눈을 감아버렸다 돈을 건넨 적도 없다 나의 섣부른 동정에 내가 머뭇거려 얼른 그곳을 벗어났다 그래서 더 그녀와 아기가 맘에 걸렸고 어떻게 살아가는지 궁금했는데 어느 늦은 밤 그곳을 지나다 또 그녀를 보았다 놀라운 일이 눈 앞에 펼쳐졌다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그녀가 바닥에서 먼지를 툭툭 털며 천천히 일어났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흔들리지도 않았다 자, 집에 가자 등에 업힌 아기에게 백년을 참다 터진 말처럼 입을 열었다 가슴에 얹혀 있던 돌덩이 하나가 쿵, 내려앉았다 놀라워라! 배신감보다는 다행이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 비난하고 싶지 않았다 멀쩡한 그녀에게 다가가 처음으로 두부 사세요 내 마음을 건넸다 그녀가 자신의 주머니에 내 마음을 받아넣었다 그녀는 집으로 돌아가 따뜻한 밥을 짓고 국을 끓여 아기에게 먹일 것이다 멀어지는 그녀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다 뼛속까지 서늘하게 하는 말, 다행이다

- 다행이라는 말 / 천양희

"얘야, 그만 해서 다행이다. 집에 불이라도 났더라면 어쨌겠니. 다행이라고 생각해라." 무너진 가마를 보고 망연자실해 있는 딸에게 노모가 한 말이었다. 이틀간 잠을 설치며 불을 지폈는데 식히는 도중에 가마는 무참히 무너졌다. 수백 개의 도자기들도 같이 묻혔다. 그러나 가끔씩 성한 도자기를 건지며 초보 도예가는 웃었다. "여기에도 생존자가 있어요." 노모의 위로가 그녀의 아름다운 미소를 되찾아주었다. 이것은 사람을 살리는 말이다. "참 다행이예요."

거리에서 구걸하는 사람을보며 우리는 혀를 찬다. 젊은 게 무슨 할 짓이 없어 빌어먹고 다녀, 저건 장애를 위장한 앵벌이야, 도와 줄 필요가 없다니까. 뒤틀린 팔다리를 펴고 언제 그랬냐는 듯 일어서는 모습을 본다면 나는 어떨까. 시인은 배신감이 아니라 다행이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고 한다. 옳고 그름, 선악과 윤리를 떠나 시인의 마음씨에 가슴이 뭉클하다. 얼마나 안스럽게 느껴졌으면 그럴까. 시인은 앉은뱅이가 일어서는 기적을 본 듯 감사해 한다. 이것이 사람의 마음이 아닐까.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