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사소한 물음들에 답함 / 송경동

샌. 2011. 3. 23. 07:28

스물여덟 어느 날
한 자칭 맑스주의자가 새로운 조직 결성에 함께 하지 않겠냐고 찾아왔다
얘기 말엽에 그가 물었다
그런데 송 동지는 어느 대학 출신이요? 웃으며
나는 고졸이며, 소년원 출신에
노동자 출신이라고 이야기해 주었다
순간 열정적이던 그의 두 눈동자 위로
싸늘하고 비릿한 유리막 하나가 쳐지는 것을 보았다
허둥대며 그가 말했다.
조국해방전선에 함께 하게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라고.
미안하지만 난 그 영광과 함께 하지 않았다

십수 년이 지나 요 근래
다시 또 한 부류의 사람들이 자꾸 내게
어느 조직에 가입되어 있느냐고 묻는다
나는 다시 숨김없이 대답한다
나는 저 들에 가입되어 있다고
저 바닷물결에 밀리고 있으며
저 꽃잎 앞에서 날마다 흔들리고
이 푸르른 나무에 물들어 있으며
저 바람에 선동당하고 있다고
없는 이들의 무너진 담벼락에 기대 있고
걷어 채인 좌판, 목 잘린 구두
아직 태어나지 못해 아메바처럼 기고 있는
비천한 이들의 말 속에 소속되어 있다고
대답한다, 수많은 파문을 자신 안에 새기고도
말없는 저 강물에게 지도받고 있다고

- 사소한 물음들에 답함 / 송경동

시가 가슴을 울린다. ‘나는 저 들에 가입되어 있다고 / 저 바닷물결에 밀리고 있으며 / 저 꽃잎 앞에서 날마다 흔들리고 / 이 푸르른 나무에 물들고 있으며 / 저 바람에 선동당하고 있다고’

이 시가 수록된 시집 <사소한 물음들에 답함>으로 시인은 작년에 ‘천상병 문학상’을 받았다. 시인의 수상 소감으로 감상을 대신한다.


<수상 소감> 내가 떠나온 ‘소풍’들에 대해

살아생전 천상병 시인은 자신의 삶을 ‘아름다운 소풍’이라고 했습니다. 그 삶을 기억하는 많은 이들이 도리어 슬퍼하고 아파했습니다. 하늘이 그에게 내린 소풍은 태어나면서부터 결코 아름답지만은 않았기 때문입니다. 식민지의 아들로 제 땅이 아닌 일본에서 나고 자라야 했던 첫 소풍이 그랬고, 비판적 지식인으로 거듭 태어나야 했던 대학 시절이 그랬고, 서울대를 나와서도 누구처럼 좋은 자리를 덜컥 차고앉을 수 없었던 시대적 고뇌가 그랬습니다.

이 세상은 ‘새’처럼 자유롭고만 싶은 그를 ‘동백림 사건’에 연루해 중앙정보부 고문실로 결코 달가울 수 없는 ‘소풍’을 보냈습니다. ‘아이론 밑 와이셔츠처럼’ 고문을 당하며 6개월간의 긴 소풍을 보내고 나왔을 때, 그는 아이를 가질 수 있는 천부의 인권마저 박탈당해 있었습니다. 더더욱 아픈 그를 다시 행려병자로 만들어 시립정신병원에 가두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런 악독했던 세상을 ‘아름다웠다고’ 말했습니다.

누구도 미워하거나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누구를 원망하거나 미워하기 전에 자신과 같은 고통 속에서 살아가는 모든 이들의 삶이 아름답기만을 간절히 바랐던 듯싶습니다. 아파본 사람만이, 바닥까지 절망해 본 사람만이, 소중한 것들을 박탈당해 본 사람만이, 소외의 극점까지 내몰려 본 사람만이 얼마나 이 세상이 갸륵한 것인지를, 얼마나 아름답고 존엄한 것인지를 깨닫게 되는가 봅니다.

전 그렇게 저에게 다가온 ‘소풍’들을 아름답게 느끼기는커녕 끔찍이도 저주했던 사람입니다. 가난하고 아픔 많던 시골집 아이로 나를 던진 저 하늘을 미워했고, 소년원과 도회지 뒷골목과 건설일용노동자로 떠돌아야 했던 모든 ‘소풍’이 ‘지옥에서 보낸 한철’처럼 고단하고 힘겨웠습니다. 나만이 아니라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렇게 이 세상의 험난한 ‘소풍’을 견디며 살아가는 것을 보며 아팠습니다.

그 아픔들의 밭이 저를 길러주는 기름진 텃밭이 될 줄은 그땐 잘 몰랐습니다. 시나브로 조금은 사람들이 평등하고 평화로웠으면 좋겠다는 자연스런 꿈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런 제가 선택한 소풍은 나와 비슷한 아픔을 겪어 온 사람들의 해방을 위해 일하는 소풍이었습니다. 이 세상 전체가 이제 그만 분쟁 없이, 경쟁 없이, 차별과 소외 없이 아름다워졌으면 좋겠다는 꿈이었습니다.

남의 소풍 가방을 열고 또 무엇인가를 뺏어가는 사람들이 없는 사회, 누구나 자신이 가고 싶어 하는 생의 소풍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사회, 사람들 서로 경쟁하는 대상으로 놓이지 않고 서로 다른 소풍의 경이와 환희를 나눠 갖는 사회, 그런 사회를 만들기 위해 새벽길 떠나는 사람들과 마주하는 소풍이었습니다.

새로운 소풍 역시 마냥 즐거운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가는 곳마다 아름다운 소풍을 가로막는 장애물들이 나타났습니다. 무장한 세계화를 넘어 평화로운 지구촌을 꿈꾸며 걷던 평택 황새울 들판에서는 1만 6천여명의 군경과 마주쳤으며, 두 번이나 목이 졸리고 머리가 깨져 병원으로 실려가야 했습니다.

860만 비정규직 시대를 넘자고 40일 굶은 기륭전자 비정규직 여성노동자들과 함께 두 번 들어갔던 국회의사당, 그 소풍 역시 경찰들에 의해 무자비하게 짓밟혀야 했습니다. 용산 철거민들을 살려내라고 밤새 어둔 서울 거리를 촛불시민들과 헤매다 두 팔이 꺾여 끌려가야 했습니다. 희망을 찾기 위해 찾아간 삶의 현장은 가는 곳마다 희망보다는 절망의 소리들이 더 많아 조용히 눈을 감거나, 귀를 막고 싶을 때가 많았습니다.

하지만 전 이 새로운 소풍을 통해 꿈마저 잃으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 삶들의 존엄함을 알았습니다. 스스로 희생해 이 사회에 다른 세계를 놓고 가는 사람들의 숭고함을 조금은 배우게 되었습니다. 절망 끝에 놓인 사람들이 사실은 위로받아야만 될 대상이 아니라 우리를 지금보다는 조금은 더 자유롭고 민주화된 사회로 이끌고 가는 착한 소의 아픈 코뚜레임을 깨닫게 되기도 했습니다. 그런 이야기들을 시로 써보고 싶었습니다.

그런 배움의 시절들을 지나, 두 번째 시집 <사소한 물음들에 답함>의 후기에 썼듯 이렇게 부족한 저에게도 ‘우연히 오게 되었지만, 이 세상은 참 아름다운 곳’이었습니다. 미워할 일보다 사랑할 일이, 절망할 일보다 꿈꿀 일이, 다툴 일보다 새롭게 느낄 일이 훨씬 많은 곳이었습니다. 아마도 그런 마음 더 소중하게, 잘 간직하라고 생각지도 못했던 큰 상을 주시나 봅니다.

좌절하지 말고 저에게 주어진 ‘소풍’을 잘 마무리 하라고, 또 어떤 더 가혹한 ‘소풍’으로 세상이 저를 보내더라도 너무 외롭게만 생각하지 말라고 큰 덕을 주시나 봅니다. 일면식도 드물었던 심사위원 선생님들, 신경림 선생님과 정호승, 이경철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내게 이런 소풍을 선사해 주었던 모든 생의 인연들에 감사합니다. 천상병 선생님처럼 ‘이 세상 소풍 끝나는 날 /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할 수 있도록 더 열심히 나의 ‘소풍’을 살아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