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본느낌

사랑의 광기

샌. 2010. 1. 6. 10:09

민음사에서 나온 <파리의 노트르담>을 읽었다. 두 권으로 되어 1천 페이지에 이르는 완역본이다. 예전에 <노트르담의 꼽추>로 나온 것은 분량이 반밖에 안 되는 다이제스트 판이었다. 그때는 성당 종지기와 집시 처녀와의 순수한 사랑 이야기로 받아들였던 것 같은데 지금 다시 읽으니 도리어 정반대다. 중세 시대 인간 군상들의 사랑의 광기를 그린 내용으로 읽힌다.


소설에서 중심인물은 노트르담의 꼽추인 카지모도라기 보다는 라 에스메랄다이다. 이야기는 노트르담 사원에서 열리는 광인 축제일에서 시작된다. 성당의 부주교인 클로드 프롤로의 명령으로 카지모도는 라 에스메랄다를 납치하려 하지만 실패한다. 야경대장 페뷔스의 도움으로 아가씨는 구출되고 그녀는 순간에 페뷔스에게 반한다. 그리고 죽을 때까지 변치 않는 이 외골수 사랑이 갈등과 불행의 씨앗이 된다. 부주교와 종지기는 라 에스메랄다를 사랑하지만 그녀에게는 페뷔스밖에 없다. 넷 사이에 얽히고설킨 사랑과 미움과 질투의 관계가 이 소설을 이루는 구조다. 결국 페뷔스를 제외한 셋은 비참한 죽음으로써 생을 마친다.


이들의 관계를 과연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까? 소설을 읽던 처음부터 끝까지 떠나지 않던 의문이다. 학식과 명망이 있던 성당의 부주교는 광장에서 춤추는 라 에스메랄다를 보고 한 순간에 반해 버린다. 이 여인을 위해서는 신앙마저도 헌 신짝처럼 버린다. 그리고 페뷔스, 카지모도와는 연적이 되어 칼부림까지 마다 않는데 끝내는 카지모도에게 죽임을 당한다. 카지모도도 마찬가지다. 육체적 불구로 자신의 한계를 잘 아는 그는 그녀를 향한 지순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집착의 면에서 본다면 카지모도는 잃을 게 없어서 그렇지 부주교인 클로드와 별반 다를 게 없다. 라 에스메랄다도 그렇다. 인간적으로는 속물인 페뷔스를 죽을 때까지 놓지 못한다. 카지모도는 그녀의 목숨까지 구해주지만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카지모도의 간절한 구애는 뿌리치고 페뷔스에게만 메아리 없는 사랑을 보낸다. 그러나 페뷔스는 그녀를 오직 육욕의 대상으로서만 여긴다. 결국 그것이 불행의 원천이 되고 라 에스메랄다는 교수대의 이슬로 사라진다.


자루 수녀라 불리는 은자도 있다. 잃어버린 딸을 잊지 못해 스스로 독방에 갇혀 15 년의 고행을 하고 있는 여자다. 마지막 순간에는 라 에스메랄다가 자신의 딸임을 알아보지만 그녀의 자식에 대한 집착을 과연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그녀 역시 비극적인 최후를 맞는다. 라 에스메랄다, 클로드, 카지모도, 자루 수녀 등이 보여준 이런 모습들을 나는 ‘사랑의 광기’라고 부르고 싶다. 연인간의 사랑이나 부모 자식간의 사랑이나 마찬가지다. 모든 사랑에는 얼마간의 광기가 포함되어 있는 게 사실이긴 하지만 스스로뿐 아니라 남까지 파멸에 이르게 한다는 점에서 무지하고 어리석은 짓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것 역시 인간 본성의 한 부분인 것은 사실이다. 하이네는 '사랑은 광기다'라고 했다. 때로는 무미건조한 일상에서 이런 광기의 사랑이 그리워지기도 한다. 그것이 사람이다.


집착, 소유욕, 폭력성, 정복욕이 뒤엉켜 사랑이라는 모습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아니, 사랑 자체가 그런 속성을 가지고 있다. 사랑은 차가운 세상을 따뜻하게 해 주지만 모든 걸 태우는 정염의 불길이 되기도 한다. 사랑은 봄날의 미풍이면서 한여름의 폭풍이다. 사랑은 생산적이면서 파괴적이다. 육욕과 플라토닉 러브가 사랑에는 함께 들어있다. 옛날 그리스 사람들은 사랑을 속성에 따라 에로스, 필리아, 아가페 등 대여섯 가지로 나누었다. 이 소설의 인물들의 사랑은 그중에서도 마니아(mania)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마니아는 격정적인 사랑을 말하는데 환희와 절망, 광기가 연속으로 계속된다. 그러나 종말은 대개 갑작스런 파탄과 불행으로 이어진다. 어찌 보면 사랑의 가장 원시적인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이성을 잃은 상태에서의 상대에 대한 집착은 광기로 나타난다. 이런 사랑은 대개 일방적인 짝사랑이다. 소설에 나오는 네 사람의 행동이 그런 사랑을 잘 그리고 있다.


이 소설의 배경은 1400년대 후반의 노트르담을 중심으로 한 파리다. 당시 파리 풍경이나 사람들의 생활상이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어 마치 그 시대로 돌아간 듯한 착각을 하게 된다. 아마 다음에 파리에 간다면 노트르담 사원 종탑에는 꼭 올라가 볼 것이다. 또한 소설에는 국왕, 성직자, 법률가, 행정관리들의 부패상과 고통 받는 민중들의 모습이 잘 그려지고 있다. 귀가 먼 판사가 피고의 말을 듣지도 않으면서 판결을 내리는 장면, 라 에스메랄다의 마녀 재판과 고문 장면도 인상적이다. <파리의 노트르담>에는 어수선한 중세 시대 파리의 풍경이 잘 나타나 있어 무척 흥미롭다. 특히 광기에 휩싸인 인간들의 모습에서 오늘의 우리를 되돌아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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