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본느낌

열정의 습관

샌. 2009. 12. 28. 15:56

“섹스를 잘하는 남자와 하는 섹스죠. 여자에 대해 너무나 잘 아는 남자. 지식과 경험과 전술과 창조성이 풍부한 남자. 터부가 없는, 아주 자유롭고 성적 재능이 있고 대담하고 감각적인 남자와 하고 싶어요. 그에게도 성감대가 아주 풍부하다면 더욱 화려하겠죠.”


“남자가 나를 함부로 대했으면 좋겠어요. 입에 담지 못할 욕을 하고, 엉덩이를 때리고 몸을 묶은 뒤 수치스럽게 느껴지는 체위를 구사하기를 바래요.”


“한없이 오래 해보고 싶어요. 두 시간이나 세 시간쯤 계속. 어떤 상상의 힘도 빌리지 않고 완벽하고 감미로운 단계를 지나 오르가슴에 이르기까지 한순간도 그를 잊지 않고 의식하는 섹스. 그러니까 난 끝까지 사정하지 않는 남자를 기다려요.”


“낯선 남자에게 반쯤, 거의 부드럽게 강간을 당하는 섹스를 원해요. 아주 어렵겠죠. 내가 준비하지 않고, 예상하지 못한 상태에서 일어나야 하니까요. 그리고 무서워서 부들부들 떨리면서도 조용해야 하고 황홀해야 하니까요.”


“내가 원하는 섹스는 남자를 괴롭히는 섹스랍니다. 그의 두 눈을 가린다든지, 두 손을 묶는다든지, 혹은 그가 사정하려고 할 때마다 빠져나가버려서 끝내 하지 못하도록 막는다든지, 시청의 민원실 같은 공공장소에서 자극해서 그의 바지 속을 더럽힌다든지......”


“난 어둠 속의 포르노그래피가 아니라, 일상이 되는 섹스를 원해요. 아침밥을 먹다가 숟가락을 놓고 식탁 의자 다리들과 함께 엉기거나, 한적한 거리의 오목한 곳에서 아이스크림을 손에 든 채 잠시 속옷을 내리고 아주 짧게 삽입을 하기도 하고, 사람들이 오가는 한낮의 공원 벤치에서 남자의 무릎 위에 앉아 뒤가 트인 스커트를 벌리고 행인들은 상상도 하지 못할 삽입 상태를 즐기는 일상적이고 모험적이고 재미있는 섹스, 삽입한 상태 그대로 몸을 틀어 크로스 상태로 마주 보며 술을 나누어 마시고 잡담을 하면서 마치 그네 위에서 조금씩 움직이는 것처럼 거의 무심하기까지 한 나른한 섹스......”


전경린의 소설 ‘열정의 습관’에 나오는 한 부분이다. “당신은 어떤 섹스를 원하나요?”라는 미홍의 질문에 대한 여러 여자들의 대답이다. 우리 문화에서 성에 대한 논의는 금기시되어 왔다. 특히 여자들의 경우는 더하다. 성과 여성의 몸이 상품화된 지금도 성에 대한 제대로 된 담론은 여전히 어색하다. 여성의 성욕에 대한 표현은 터부시되고 윤리나 습관의 질곡에 매여 있다. 그런 점에서 이 소설은 여자들의 성에 대한 의식을 적나라하게 드러내 준다. 마치 비밀스러운 것을 들킨 듯한 느낌이 들어 당혹스럽기도 하지만 등장인물들의 솔직하고 진솔한 고백들이 마음에 든다.


이 소설은 미홍, 가현, 인교라는 세 여자의 각각 다른 성적 경험과 상처, 성장에 대한 얘기다. 여자들이 섹스를 어떻게 생각하는가는 남자들에게는 무척 궁금하다. 여자도 남자와 마찬가지의 성적 욕구를 갖고 있는 게 당연한 일이건만 그걸 언어로 확인하게 되는 건 또 다른 감정 세계에 속하는 일이다. 이 소설은 여성 작가에 의한 여성들의 이야기여서 더욱 흥미롭다. 작가의 감성적인 문체가 빛을 발하는 소설이다. 여성의 심리는 역시 여성에 의해서만 제대로 묘사될 수 있는 것 같다. 소설을 읽으면서 여성이나 여성의 성에 대해 많이 무지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깨달음이 좀더 빨랐다면 더 좋았겠지만 말이다. 이 책의 내용을 여성들이 얼마나 공감할지는 모르지만 여성뿐만 아니라 남성들도 한 번쯤 읽어볼 만 하다고 생각된다.사람에 따라서는자신과 상대의 성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환상과 편견을 깨뜨리는데 도움을 받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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