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본느낌

삶은 농담이다

샌. 2009. 12. 30. 09:39

방학이 되어 찾아온 자유시간이 감사하다. 느닷없이 받아든 선물에 어리둥절하는 아이처럼 아직도 들뜬 기분이 가시지 않는다. 이 축복의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마음은 여전히 설렌다. 매일 휴대폰 알람에 억지로 잠이 깨어 출근하고정해진 시간표대로 지내야 하는 일과에서 한 순간에 해방되었으니 그럴 만도 하다.몸과 마음이 적응하는데는얼마간의 시간이 필요하리라.지난 가을에 허리 쪽 돌발변수가 생기지 않았다면 아마 지금쯤 히말라야로의 출발을 앞두고 있을 것이다. 내가 빠진트레킹 팀은 모레 안나푸르나로 출발한다. 덕분에 올 방학은 길고 온전한 휴식이 주어졌다.이 선물 보따리를 앞에 두고 가능하면 천천히 끈을 풀고 싶다.

어제는책장에서 오래된 소설 한 권을 꺼내 들었다. 마침 손에 잡힌 것이 은희경의 '새의 선물'이었다. 연대를 보니 1995년에 츨판되었는데 제 1회 문학동네 소설 부문 수상작이었다. 제목이 생소했지만 책을 펼치니 군데군데 옛날에 읽었던 기억이 떠오른다. 그리고 안방에 누워 빈둥거리며 재미있게 다시 읽었다.

소설의 무대는 1969년의 고창이고 주인공은 열두 살의 조숙한 여자 아이다. 출생지나 나이를 볼 때 이 소설은 은희경 님의 자전적 성장 소설이라고 믿어진다. 그리고 나 역시 비슷한 시대에 시골의 작은 읍에서 성장했기에 공감되는 바가 많았다. 소설에는 60년대 후반의 골목 풍경과 다양한 유형들의 사람들이 사실적이고 정겹게 그려지고 있다.특히 차부 풍경 같은 당시의 시골 읍의 묘사는 일품이다.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60년대의 내 고향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소설가가 나와 동시대를 살았고 비슷한 경험의 영역을 가지고 있다는 것에 너무나 친밀감이 느껴진다.

열두 살 여자 아이의 눈으로 본 세상을 통해 삶이 무엇인지를 되돌아보게 된다. 소설에는 개성 있고 다양한 사람들이 등장하는데 모두 우리가 어디서 만난 것처럼 느껴지는 친근한 이웃들의 모습이다. 그 아프고 서걱거리는 풍경 속에는따스한 정과 인간애가 살아있어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다만 아무리 조숙하다 하더라도 열두 살 아이의 정신연령을 뛰어 넘는 심리 묘사는 조금 불편하게 느껴진다. 그것은 나의 열두 살과 자꾸 비교되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결손가정의 아이로 외할머니 밑에서 자라는 주인공은 인생의 비밀을 너무 일찍 들여다 본 것 같다. 반면에 그것이 이 아이의 매력이기도 하다.

우리는진실된 삶, 진실된 사랑을 묻는다. 그러나 진실이란 무엇일까? 이 소설을 읽다 보면 우리 삶의 허위가 벗겨지고 생살이 드러나는 느낌이다. 얼마간은 당혹스럽기도 하지만 그러나 곧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삶에서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산다는 게 고작 이런 것인가. 겉모습에 현혹되지 마라. 가식과 위선 너머의 삶의 이면을 일찍 알아버린 주인공은 삶과 사랑에 냉소적일 수밖에 없다. 어찌 되었든 사는 게 뭔지를 묻게 되는 책은 좋은 책이다.

"삶도 그런 것이다. 어이없고 하찮은 우연이 삶을 이끌어간다. 그러니 뜻을 캐내려고 애쓰지 마라. 삶은 농담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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