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시절에 여러 면에서 공통점이 많은 친구가 있었다. 성격뿐만 아니라 공부나 노는 방식도 비슷했다. 전공에 그다지 흥미를 느끼지 못한 점도 닮아서 같이 고시 공부를 시작하기도 했다. 자연히 둘이서 어울려 지내는 시간이 많았다. 그런데 묘하게도 여학생을 짝사랑하는 시기도 비슷했다. 강의실에서 만나는 타과 여학생에 마음을 뺏긴 것이다.
속으로 애만 태웠던 나에 비해 친구는 적극적으로 나섰다. 그 여학생이 활동하고 있는 동아리에 가입해서 안면을 익히며 접근했다. 그러나 진도는 상당히 느렸다. 친구는 진행 상황을 수시로 나에게 들려주었지만 몇 달이 지나도 데이트 한 번 하지 못했다. 그럴수록 친구의 속앓이도 점점 깊어졌다. 내 코가 석 자이기도 한 나는 도움을 줄 위치에 있지 않았다. 하소연을 들어주고 술을 사주는 게 고작이었다.
육 개월 정도 지났을 것이다. 그녀가 좋아하는 상대가 따로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중간에 끼어든 친구는 관심 밖이었다. 그때는 요즘처럼 개방적인 시대가 아니었고 애인이 있다고 하면 대체로 물러섰다. 친구의 성격도 전투적이 되지 못했다. 친구는 자신의 마음을 고백하고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깨끗이 잊겠다고 결심했다. 포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래도 친구는 일말의 희망을 버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둘 사이에 무슨 말이 오갔는지는 모르지만 친구를 통해 그녀가 완곡하게 거절하더라는 의미만 전해 들었다. 친구도 더 자세한 말은 하지 않았다. 아무렇지 않은 듯했지만 속쓰림이 어떠했을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친구는 그 뒤에 동아리를 탈퇴하고 놀라울 정도로 빨리 달아올랐던 마음을 정리했다. 겉으로는 그랬다. 그리고 잃어버린 육 개월을 만회라도 하려는 듯 더욱 공부에 매달렸다.
반면에 나는 말 한마디 붙여보지 못한 채 열기가 사그라졌다. 대신에 친구보다는 온기가 오래 갔다. 졸업하기 전까지도 그녀의 뒷모습을 보면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때의 에피소드가 친구에게는 쓰라렸겠지만 나에게는 애틋한 경험이 되었다. 차라리 혼자만의 짝사랑으로 그친 게 더 나았는지 모른다. 과정은 달랐지만 두 사람은 그렇게 서서히 잊혀갔다.
정기적으로 만나는 모임에 최근 여자 신입회원이 들어왔다. 이름이 낯익다 했는데 알고 보니 친구의 옛 사랑이었다. 40년 전 캠퍼스에서 친구의 마음을 빼앗아갔던 바로 그 주인공이었다. 만나야 할 사람은 언젠가는 만나게 된다고 한다. 우연이라 부르기엔 뭔가 아쉬워 사람들은 인연이라 부르는 것 같다.
그녀는 친구의 이름을 부정확하지만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때의 속사정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는 것 같았다. 워낙 비대칭적인 관계였으니 당연했다. 내가 상기시켜 줄 이유도 없었다. 누구에게는 대수롭지 않은 게 누구에게는 세상을 걸 만한 중대사가 되기도 한다.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 다가갈 수 없었던 막막함이 있었다. 뒤돌아보는 나는 스쳐가는 가을바람처럼 쓸쓸해진다. 꼭 사람 관계만이 아니라 모든 과거가 그렇다. 색바랜 옛 사진을 들여다보는 듯 생경해서 앨범을 펼치지 않는 마음과 비슷하다. 40년은 엊그제 같기도 하지만 너무 멀기도 하다. 타임머신을 타고 온 그녀를 보며 옛 시절과 익숙해지기 위해선 꽤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길위의단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국정 (0) | 2015.11.07 |
---|---|
제 분수도 모르고 (0) | 2015.11.02 |
65에서 75 사이 (0) | 2015.10.01 |
그리니치 올해의 천체사진 (0) | 2015.09.23 |
한 장의 사진(21) (0) | 2015.09.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