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위의단상

국정

샌. 2015. 11. 7. 12:28

'국정(國定)'이란 말 그대로 나라에서 정한다는 뜻이다. 일단, 나라가 그럴 자격이 있는지 의문이다. 유신 때도 교과서를 국정화하면서 독재를 미화하고 한국적 민주주의로 포장해서 가르쳤다. 이름만 국가를 내걸었을 뿐 실은 권력자의 입맛에 불과하였다. 역사상 수많은 민중의 희생이 국가 폭력 아래 자행되었다. 국가를 우상화하던 시대는 지났다. 국가는 역사 가치관의 기준을 정할 자격이 없다.

 

상식적 수준에서 생각하면 된다. 역사 교과서가 잘못되어 있다고 본다면 시간이 걸리더라도 현재의 검정제도 안에서 해결할 수 있다. 검정 기준을 강화한다든지 새로운 교과서를 만들어 시장에 내놓으면 된다. 일본이 하는 방법이다. 일본은 비난하면서 더 나쁜 짓을 지금 정부는 하고 있다. 마음에 안 든다고 국정 체제로 가는 건 선친을 닮은 쿠데타적 발상이다.

 

정부는 군사 작전을 하듯이 역사 교과서의 국정화를 확정 고시했다. 국민 다수가 반대하고 있다는 여론조사를 보고서도 강행했다. 국정화를 홍보하는 내용도 치졸하기 그지없다. 우리 동네 앞에도 '아이들이 주체사상을 배우고 있습니다'라는 현수막이 내걸렸다. 교과서에 '주체사상'이라는 문구가 나온다고 김일성을 찬양하는 교육을 받는다고 호도하고 있다.

 

부끄러운 역사는 부끄러운대로 가르쳐야 한다. 역사 기술에 해석이 들어가는 건 어쩔 수 없지만 객관성은 지켜야 한다. 자학사관이라는 용어에도 문제가 있다. 일본이 하는 행태를 보면 안다. 배타적 민족주의로는 국제사회의 시민으로 자라나기 어렵다. 우리 세대는 대부분 그런 경험을 했다. 교과서에서 배운 내용이 우물 안 개구리에 불과했음을 나중에 깨달았을 때는 무척 허탈했다.

 

이번 사태를 보면서 우리 사회는 토론과 커뮤니케이션이 부족하다는 걸 절감한다. 교과서는 교육 정책의 큰 줄기인데 너무 졸속으로 처리되고 있다. 국정으로 바꾸자면 긴 시간 국민적 합의를 얻는 기간이 필요하다. 현행 교과서의 무엇이 문제이고 어떻게 고치면 마땅한지 학자들 간에 활발한 논의의 장을 마련해야 한다. 그런 절차를 무시한 일방적 독주는 위험하다.

 

자신감에 넘친 이 정권을 보니 차기는 물론이고 차차기까지도 집권하는 데는 문제가 없다고 판단한 것 같다. 정권이 바뀌면 일 년짜리 교과서가 될 게 뻔한데 일말의 조심성만 있어도 이렇게 무리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지도층의 역사적 소명감 때문이라면 더 무서운 일이다. 소신과 원칙이 지나치면 큰 탈을 일으킨다.

 

나는 교과서가 어느 쪽으로 편향되어서가 아니라 국정화라는 제도를 반대한다. 어떤 사안에 대해서 옳으냐 그르냐를 판단하는 건 어려운 일이다. 더구나 국가가 나서서 함부로 재단할 수 없다. 국가의 간섭은 최소한이 되어야 한다. 그것이 자유시장주의 신봉자들의 이념과도 맞지 않는가. 정권이 바뀐다고 다시 권력자의 구미에 맞는 내용으로 변할 국정은 곤란하다. 천년만년 변하지 않을 완벽한 교과서를 만들겠다고 하는데 참으로 허무맹랑한 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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