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화엄 세계 읽다 / 김정원

샌. 2012. 5. 4. 07:58

초가집 그을음 새까만 설거지통 옆에는

항시 큰항아리 하나 놓여 있었다

어머니는 설거지 끝낸 물 죄다 항아리에 쏟아 부었다

하룻밤 잠재운 뒤 맑게 우러난 물은 하수구에 흘려보내고

텁텁하게 가라앉은 음식물 찌꺼기는 돼지에게 주었다

가끔은 닭과 쥐와 도둑고양이가 몰래 훔쳐 먹기도 하였다

하찮은 모음이 거룩한 살림이었다

 

어머니는 뜨거운 물도 곧장 항아리에 쏟아 부었다

그냥 하수구에 쏟아 붓는 일은 없었다

반드시 하룻밤 열 내린 뒤 다시 만나자는 듯

곱게 온 곳으로 돌려 보냈다

하수구와 도랑에 육안 벗어난 존재들 자기 생명처럼

여긴 배려였으니, 집시랑물 받아 빨래하던 우리 어머니들 마음

經도 典도 들여다본 적 없는

 

     - 화엄 세계 읽다 / 김정원

 

터의 문제가 아니라 먼저 마음의 문제란 걸 단임골 다녀온 후 새롭게 느꼈다. 아무리 예쁜 집도 사는 사람의 마음이 병들어 있다면 죽은 거처가 된다. 그러나 향기로운 사람이라면 그가 사는 곳이 어디든 꽃처럼 피어난다. 단임골이 왜 아름다운지를생각해 본다.

 

화엄 세계는 모두가 아름다운 꽃으로 피어나는 세계다. 經도 典도 들여다본 적 없는 옛 어머니들 마음속에 화엄 세계가 꽃 피어 있다. 도시고 시골이고 사는 게 마치 전쟁터 같아진 세상, 보이지 않는 미물도 자기 생명처럼 아꼈던 그 고운 마음은 어디로 사라졌는가? 우리는 너무 많이 얻어서 너무 많이 잃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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